[문학이 일상을 만날 때]망향의 고독, 모국어를 담금질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08년 5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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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계한 박경리 선생의 업적 중 무엇보다 큰 것은 모국어를 찬란하게 일군 공일 것이다. 그는 작가의 운명이 모국어를 벼리는 데 있음을 일찍이 알았고, ‘토지’를 통해 그 운명에 기꺼이 몸을 던졌다. 이 대작은 문학이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렸다.
여기 두 명의 시인이 있다. 모두 이국땅에서 살아가면서 모국어로 쓴 시를 모국에 보내오는 사람들이다. 1966년 도미해 오하이오 주 톨레도에서 의사로 일한 마종기(69) 시인. 퇴근하고 귀가해 아내와 말할 때를 제외하면 온종일 영어만 써야 했다. 환자를 대하는 의사, 강의를 하는 의대 교수로서 영어로 살아가면서 동시에 그는 모국어로 시를 쓰려고 안간힘을 써왔다.
“미국에 사는 햇수가 늘어가면서 그 일은 더욱 힘들어졌다”고 고백하면서도 그는 “그럴 때마다 ‘나는 한국의 시인이다’라는 말을 되뇌면서 스스로를 채찍질했다”고 한다. 모국어로 시를 쓰는 것만이 외국에서 오래 살아온 상실감을 보상해 주었다는 그. 자신이 쓰는 시가 스스로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내 시를 읽고 비슷한 위로를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면 평단의 갈채보다 훨씬 흐뭇하다”고 그는 밝힌다.
허수경(44) 시인이 1992년 유학을 떠났을 때 지인들은 곧 다시 올 것이라 여겼다.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독일 뮌스터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최근 논문 출판 준비를 끝냈다. 그사이 독일인 교수와 결혼했다. 가끔 한국의 지인들에게 전화할 때, e메일 쓸 때가 아니고선 그는 모국어를 쓸 기회가 없다. 종일 독일어로 말하고 독일어 책을 읽어야 하는 그는 새벽에 일어나 모국어로 시를 쓴다. “언어 역시 가슴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요. 언어가 차오르면 ‘나’라는 도구가 언어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죠. 삽이라고나 할까요. 나는 삽이에요. 언어는 내 속에서 제 삶을 살아요.”
허 씨가 독일인 친구들에게 우정을 표현하는 말을 독일어로 건네면, 친구들은 “그런 표현을 처음 듣는다”면서 감동한다고 한다. 허 씨가 생각해 보니 그 말은 우리말을 그대로 독일어로 옮긴 것이다. “그러니 처음 들어봤을 수밖에, 그러니 처음이라는 그 ‘낯섦’으로부터 감동이라는 게 오겠지요.” 그는 타국에서 그렇게 모국어를 새로이 발견한다.
외국어로 생존해야 하는 곳에서 모국어로 창작해야 하는 업을 진 작가들의 운명은 가혹하다. 그러나 두 시인은 한목소리로 “모국어는 곧 나”라고 말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공기 같은 모국어가 정말 공기처럼 소중하다는 것을, 작가들이 온힘을 다해 모국어로 지어낸 시와 소설의 무게가 비할 수 없이 묵직하다는 것을 일러준다.
<끝>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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