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527년 이차돈 순교

  • 입력 2004년 8월 4일 19시 01분


527년 신라 법흥왕 14년.

이차돈은 불교의 공인을 위해 꽃다운 피를 무정(無情)한 대지에 뿌렸다. 그의 나이 22세(또는 26세로 전한다). “이 몸이 저녁에 죽어 아침에 불교가 행해진다면 부처님의 빛이 하늘 가운데 있을 것이다….”

이차돈은 국왕의 근신(近臣)이었다. 일찍이 불교를 신봉하였던 그는 왕의 고민을 꿰뚫어 보았다. 왕은 불교를 국교로 삼고자 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대에 부대끼고 있었다.

이에 이차돈이 “왕명을 가장해 절을 지으면 반드시 귀족들이 들고 일어설 것이니 그때 내 목을 치라”고 아뢰었다. 법흥왕은 “살을 베어 몸을 상할지라도 새 한 마리를 살리는 게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만류했으나 듣지 않았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이차돈이 왕과의 밀약(密約)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의적으로 절을 지었다고 전한다. ‘흥법(興法)’의 온건파 법흥왕과 강경파 이차돈의 갈등설은 여기에 기인한다.

‘창사(倉寺)’를 도모함에 있어 이차돈은 과격했다. 그는 왕의 뜻과 무관하게 고유 신앙의 성소(聖所)인 천경림(天鏡林)에 사찰을 세우고자 했다.

귀족들은 “오랑캐의 신(부처)을 모실 수 없다”며 거세게 저항했다. 그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왕은 이차돈에게 책임을 물어 숙청했다고 하니.

이차돈의 순교는 예언대로 이적(異蹟)을 행했다. 후대에 이르러 설화 속에 윤색된 이 ‘기이한 일’의 정치적 함의는 무엇일까.

목이 금강산으로 날아가고 흰 피가 솟구쳤다? 그것은 왕이 이차돈을 처형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절대권력의 섬광(閃光)이었다. 신하를 찍어 누르는 초월적인 권위였다. 조신(朝臣)들은 동요했고 두려움에 떨었다.

불교가 한반도에 전해진 게 4∼6세기경 삼국시대.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불교를 수용하려는 왕실과 토착신앙에 둥지를 틀고 있던 귀족세력간에 힘겨루기가 벌어졌다.

불교의 공인은 곧 왕권의 강화였다. 드센 귀족들을 왕권 아래 묶어두려면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 불교는 그 대안이었다.

이차돈의 순교는 중앙집권의 통치체제를 세우고자 했던 법흥왕의 정치공작이었다. 고도의 상징조작이었다.

왕즉불(王卽佛)!

고대국가에서 왕은 부처였던 거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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