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誠信交隣’의 정신으로 한일 우호에 평생 바친 ‘우삼동’

허진석기자 입력 2015-11-04 03:00수정 2015-11-04 0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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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50년, 교류 2000년/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
[2부 조선통신사의 길]<4>아메노모리 호슈
아메노모리 호슈는 1728년에 쓴 대조선외교 지침서 ‘교린제성’에서 “조선의 독자적인 문화와 풍습을 무시하고 일본 문화로 사고하면 편견과 독단이 생겨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며 교류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존경과 배려를 강조했다. 기념관에 있는 그의 좌상(坐像·위쪽)과 1719년 사행에서 그와 우정을 쌓은 신유한이 우정의 징표로 그에게 건넨 유건. 나가하마=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 2일 아베 신조 총리와 첫 정상회담을 한 박근혜 대통령이 ‘성신지교(誠信之交)’를 강조하며 거론한 일본의 선각자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1668∼1755)는 조선통신사들이 오가던 에도 시대 외교관이자 유학자였다. 일본에서 최초로 조선말 교본을 만들고 통신사들과 깊게 교유했으며 ‘우삼동(雨森東)’이라는 조선 이름을 가질 정도로 조선을 사랑했던 그는 누구이고 그가 내세운 ‘성신’철학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이번에 취재진이 조선통신사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정에서 통신사들이 한 번도 들르지 않았던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찾아간 곳이 있으니 고인이 태어난 아메노모리(雨森) 마을이었다. 일본에서 가장 큰 호수인 비와(琵琶) 호 북동쪽 연안에 있는 시가(滋賀) 현 나가하마(長濱) 시 다카쓰키(高月) 정에 속해 있는 곳이다. 이번 시리즈는 쓰시마 섬에서 에도까지 조선통신사의 여정을 따라가는 식으로 진행될 예정이지만 기왕에 아메노모리가 언급되었으니 이번 회에서는 그에 대한 발자취를 소개하고자 한다. 마침 마을 주민들은 고인의 생가를 기념관으로 조성해 지금까지도 조선통신사를 매개로 한 한일 ‘성신 교류’를 잇고 있다. 》

○ 한 해 방문객만 1만여 명

9월 3일 히코네 역에서 기차를 타고 도착한 마을은 전형적인 농촌 시골이었다. 역 휴게실에 ‘朝鮮通信使(조선통신사)’라는 한자가 적혀 있는 포스터가 붙어 있어 가까이 가 보니 10월 17일 시(市) 예술문화회관에서 ‘아메노모리 호슈와 조선통신사’를 주제로 심포지엄이 열린다는 안내문이었다.

마을은 온통 꽃의 천국이었다. 집집 골목마다 백일홍 베고니아 같은 꽃이 활짝 피어 있어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또 수차(水車)로 끌어올린 물이 도로 한쪽으로 흐르고 있었는데 팔뚝만 한 잉어들이 노닐고 있었다. 이 마을은 일본 전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마을 가꾸기 대회’에서 아름다운 마을로 선정되었을 정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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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에서 기념관까지는 차로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최대한 생가 원형을 훼손하지 않은 듯 전형적인 일본 가정집처럼 생긴 기념관 앞에 도착하니 ‘동아시아 교류하우스 아메노모리 호슈 암(庵)’이라는 일본어 간판과 ‘어서 오세요’라는 한글 간판이 서 있었다.

‘ㄱ(기역)’자 구조로 된 건물 안은 고인의 책, 글씨 등을 전시하는 공간과 교육 공간으로 쓰는 널찍한 다다미방으로 구성돼 있었다. 집 안 가운데에는 자갈이 깔려 있는 넓은 마당에 아름다운 정원도 있었다. 히라이 시게히코(平井茂彦) 관장은 “일본에서 조선통신사에 대한 관심은 1980년대 초부터 시작됐는데 나 역시 그때서야 비로소 고인의 존재를 알게 됐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작은 시골 마을에서 고인이 태어났다는 사실에 새삼 자부심이 느껴졌고 고인이 평생 추구했던 조선과의 관계 개선에 대한 훌륭한 업적을 오늘에 되살려 한일 교류로 이어가자는 의미에서 500여 마을 주민 모두가 합심해 800만 엔(약 8000만 원)을 모아 1984년 기념관을 열게 됐다.”

주민들의 열성에 공감한 시가 현도 모자라는 예산을 지원하고 있는데 매년 한국과 일본에서 1만 명 정도가 찾는다고 한다.

전시실에 들어서니 스피커에서 고인의 일생과 기념관이 조성된 경위를 소개하는 내용이 한국어와 일본어로 번갈아 흘러나왔다. 정면에는 고인의 모습을 실제 크기로 재현한 좌상(坐像)이 놓여 있었고 그 옆으로 고인의 유품과 조선통신사 관련 자료들이 놓여 있었다. 일본 전국 각지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다양한 통신사 인형과 그림들도 있었다. 이곳에만 오면 통신사에 대한 웬만한 지식은 쌓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다미방에는 3개 벽면에 걸쳐 조선통신사 행렬도가 길게 붙어 있었는데 맨 앞에서 아메노모리가 말을 타고 인도하는 모습이 있었다.

○ 일본 최초의 조선어 학습서

아메노모리는 1668년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청소년기 교토로 나와 의학을 배웠다. 본래 지역 영주 집안이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일파에 의해 화를 입어 몰락했다고 한다.

14세였던 1682년 교토에 7차 통신사가 왔을 때 환영 인파로 들썩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더 놀란 것은 자신을 가르치던 스승이 통신사들에게 시문(詩文)을 보이고는 칭찬을 받더니 매우 기뻐하는 모습을 봤을 때였다.

이후 진로를 바꿔 당대 최고 성리학자였던 기노시타 준안(木下順庵)의 문하로 들어간다. 기노시타 문하에서 뛰어난 제자로 꼽혔던 그는 스승의 추천으로 1689년 쓰시마 번 관리로 근무하게 된다.

9년 뒤인 1698년 조선방좌역(朝鮮方佐役·현 차관급)에 임명돼 본격적으로 대(對)조선 관련 업무를 맡았으며 1702년 처음 부산 땅을 밟아 3년 동안 일본인 특별거주지이자 일본에서 온 사신들을 접대하고 재우는 시설이 있던 부산 왜관에서 일한다. 그러면서 조선말 배우기에 몰두한다.

당시 조선 통역관들을 위해 일본어 사전인 ‘왜어류해(倭語類解)’ 편집을 돕던 아메노모리는 일본 통역관들을 위해 ‘교린수지(交隣須知)’라는 조선말 교본을 쓰기에 이른다. 일본 최초의 조선어 학습서라고 할 수 있는 책에는 경상도 사투리도 상당수 있어 아메노모리가 사투리까지 구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책은 메이지 초기까지 널리 읽혀 일본 내 조선말 보급에 큰 역할을 했다.

아메노모리는 접대와 문서를 관리하는 진문역(眞文役) 자격으로 통신사 행렬을 1711년과 1719년 두 차례 에도까지 안내한다. 1719년 사행을 함께하며 우정을 쌓았던 신유한(申維翰)은 사행록 ‘해유록(海游錄)’에서 “한어(漢語)에 능통하고 시문에 밝은 일본에서 제일가는 학자”라고 그를 평했다.

아메노모리의 ‘성신(誠信)’ 정신은 1728년에 쓴 대(對)조선외교 지침서 ‘교린제성(交隣提醒)’에 집약되어 있다. 책에서 그는 ‘조선의 독자적인 문화와 풍습을 무시하고 일본 문화로 사고하게 되면 편견과 독단이 생겨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며 교류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으로 존중과 배려를 강조했다.

그러면서 내세운 ‘지켜야 할 54가지 항목’ 중 마지막 항목에서 ‘성신’을 내세우며 ‘진실한 마음을 갖고 서로 속이지 않고 다투지 않으며 진실을 가지고 교제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고인은 또 책에서 임진왜란에 대해 ‘명분 없는 살상극’이라 했으며 조선인 귀와 코를 베어와 묻은 귀 무덤을 두고 ‘일본의 불학무식(不學無識)을 드러낸 것’이라고 개탄했다.

1755년 쓰시마 섬에서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고인은 현재 쓰시마 섬 이즈하라에 부인, 아들과 함께 나란히 묻혀 있다.

쓰시마 섬 이즈하라에 있는 아메노모리 호슈의 무덤. 그는 이곳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한 뒤 여생을 마쳤다.
○ 한국 어린이들을 우리 집에서

아메노모리 마을 사람들은 한일 관계가 악화된 최근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인의 뜻을 잇는 진실한 우정을 한국과 나누고 있었다. 특히 무려 20년이나 넘게 미래 세대에게 교류 정신을 새기려는 노력이 인상적이었다.

부산과 서울의 초등학교와 상호 교류를 하면서 30∼40명의 초등학생들이 여름에 이곳에 오면 주민들이 1명씩 맡아 집에서 재우면서 홈스테이를 시키고 있었던 것. 조정순 나가하마 민단 부인회장은 “처음에 서먹해하던 아이들도 헤어질 때는 눈물을 흘리곤 한다”고 했다.

옆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히라이 관장은 “조선통신사들도 고국으로 떠나면서 아메노모리와 눈물의 작별 인사를 했었다. 사행록을 쓴 신유한은 쓰고 있던 유건(儒巾·선비들이 실내에서 쓰는 모자)을 건넸을 정도”라고 말한 뒤 갑자기 유리관에 있던 것을 꺼내 보여주었다. 고인의 책 속에 접혀 보관돼 있던 것을 90년 전에 우연히 발견해 기념관으로 옮겨왔다면서 말이다. 보존 상태가 너무 좋아 300여 년 전 것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아메노모리는 조선인 통역관 현덕윤(玄德潤)과도 각별했다. 1711년 일본에서 아메노모리와 만난 현덕윤은 16년 뒤인 1727년 부산에서 그와 재회한 뒤 사재를 들여 오래된 관청을 고치면서 건물 이름을 ‘성신당’이라고 지었을 정도다. 아메노모리는 이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성신당기(誠信堂記)’를 저술하는데 이런 구절이 있다.

‘교린의 길은 성신에 있고 지금부터 훗날도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진실한 성의의 마음은 돼지나 물고기에게까지 미치는 것이지만, 그 순간 그 장소에 한정된 성의는 어린아이도 움직일 수 없다.’

한일 정상회담으로 양국 관계 정상화의 물꼬가 트였다. 이제는 강경파의 목소리보다 아메노모리처럼 상대국을 존중과 배려의 마음으로 이해하는 성신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한일 관계의 미래를 위해 앞장서야 할 때가 아닐까.

나가하마=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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