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선택, 보수주의]<4>보수주의 재생산 구조

  • 입력 2005년 3월 9일 18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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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N 설립자인 테드 터너 씨는 1월 25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방송인 행사에서 경쟁사인 폭스뉴스를 겨냥해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나팔수고, 그 인기라는 것도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누리던 것과 다를 게 없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폭스뉴스는 ‘공화당보다 더 보수적’이라는 별명이 붙은 뉴스전문채널. 생긴 지 10년도 안돼 CNN을 제치고 뉴스전문채널 1위 자리를 차지했다.

미국사회의 보수주의가 확대재생산 구조를 갖추게 된 것은 폭스뉴스나 라디오 정치토크쇼, 그리고 지역방송 같은 보수 매체의 약진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 물론 그뿐만은 아니다.

헤리티지 재단이 펴낸 ‘현대 미국의 보수주의 운동사’는 ‘4P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보수주의 철학(philosophy)의 정립, 철학의 대중화(popularize), 철학의 정치화(politicize), 재정 지원(자선·philanthropy)을 통해 보수주의가 전성기에 올랐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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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어넘긴 철학이 정책이 됐다=1945년 오스트리아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국가 개입의 폐해를 지적한 ‘노예사회로 가는 길(Road to Serfdom)’이란 소책자를 펴냈다. 구소련의 성장, 중국 공산당의 부상, 미국 뉴딜 정책의 성공으로 온 세상이 ‘좌향좌’로 치닫던 시대에 기업중심주의, 개인의 자유, 중앙권력의 축소를 외친 것이다.

미국 출판업계의 리더인 하퍼와 맥밀란이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할 책”이라며 출판을 거절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훗날 노벨 경제학상을 탄 밀턴 프리드먼이 1960, 70년대에 “케인스 부류의 정부 재정개입 정책은 장기적인 효과가 없다”는 주장을 폈을 때도 미국 주류사회의 반응은 비슷했다.

하이에크의 철학이 미국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놀랍게도 대중잡지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통해서였다.

난해한 철학서를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 것이다. ‘4P 이론’으로 얘기하면 철학의 대중화가 이뤄진 셈이다.

▽싱크탱크, 철학의 정책화=보수주의 철학을 정책으로 발전시킨 최대 공로는 1970년대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보수주의 싱크탱크들이다. 그중에서도 미국기업연구소(AEI)와 헤리티지 재단은 현대 미국 보수주의 정책의 제조창 역할을 해 왔다.

부시 대통령의 감세정책, 작은정부론, 교육개혁, 미사일방어(MD), 온정적 보수주의는 대부분 이들 싱크탱크에서 만들어졌다.

부시 행정부에 20여 명을 진출시킨 AEI는 보수주의의 청사진을 그린다. 헤리티지 재단은 복잡한 현안을 압축한 보고서(메모랜덤·memorandum)로 의회의 두뇌역할을 한다.

‘우파국가(The right nation)’의 저자인 에이드리언 울드리지 기자(이코노미스트)는 “적어도 정책 분야에서는 리버럴리즘의 전성시대가 지나갔다”고 주장했다.

리버럴 언론들이 대학과 전통적 주류 언론을 장악해 진입장벽이 높아지자 보수 지식인들이 싱크탱크에 대거 자리를 잡은 것도 미국 보수주의 성장의 동력이 됐다.

▽보수언론의 영향력=4P의 고리 가운데 최대 전선은 언론에서 형성됐다. 지난 대선에서 뉴욕타임스, CBS뉴스 같은 전통적 주류 언론들은 눈에 띄게 한계를 드러냈다. 거꾸로 폭스뉴스와 라디오 정치 토크쇼의 막강한 영향력을 확인해 준 선거였다.

폭스뉴스는 2000년 이후 4년 동안 시청률을 8%포인트나 높였으며 특히 공화당원들이 가장 신뢰하는 미디어가 됐다.

폭스뉴스를 통해 부시 대통령의 2기 취임식을 지켜본 시청자는 4년 전보다 30% 늘어난 260만 명이나 됐다. 반면 보수파들이 ‘빨갱이 방송(Communist News Network)’이라고 비아냥대는 CNN은 4년 전보다 63%나 줄어든 77만9000명, MSNBC는 68% 줄어든 43만8000명에 그쳤다.

미국인의 22%가 매일 듣는다는 라디오 정치 토크쇼의 경우 공화당을 지지하는 러시 림보, 숀 해너티 씨 등 7명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의 주간 청취자는 무려 4600만 명이 넘는다.

해너티 씨는 대선 당시 자기 프로그램에 전화를 걸어온 청취자에게 “부시 대통령을 찍겠다고 약속하라”고 설득했을 정도로 노골적인 공화당 편향이다.

물론 언론계 전체를 보면 리버럴 언론이 압도적이다. 지난해 뉴욕타임스 조사에서 언론인들은 100 대 1이 넘는 비율로 부시 대통령보다 존 케리 민주당 후보를 지지했다. 뉴욕타임스의 고학력 독자는 150만∼200만 명이나 된다. 그래도 선거 결과를 바꾸지는 못했다.

▽보수재단의 재정지원=워싱턴에서는 ‘여론을 장악하려면 싱크탱크에 투자하라’는 말이 정설로 통한다.

대표적인 재단이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 있는 스케이프 재단. 1999년 워싱턴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이 재단은 1973년 설립 이후 26년 동안 14억 달러(약 1조4000억 원)를 기부했는데 44%인 6억2000만 달러를 보수주의 확산에 썼다. 최대 수혜자가 헤리티지 재단이었다.

헤리티지 재단은 연간 예산 3000만 달러의 절반 이상(58%)을 보수주의 지지자들의 기부금으로 조달하고 있다.

데이비드 브룩이 저서 ‘우익에 눈먼 미국’에서 ‘보수주의를 지원하는 네 자매’로 지목한 스케이프 재단, 존 올린 재단, 브래들리 재단, 스미스 리처드슨 재단은 각종 싱크탱크와 운동단체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미국 내 보수재단의 자금 배분을 조정하는 역할은 ‘자선 라운드테이블’이란 기관이 맡는다. 그런데 AEI와 네오콘(신보수주의)의 기관지 격인 위클리 스탠더드, 그리고 ‘자선 라운드 테이블’이 워싱턴 시내의 한 건물에 함께 입주해 있다.


뉴욕=홍권희 특파원 konihong@donga.com

워싱턴=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민주당 때리기’ 일등공신은 러시 림보▼

“이곳에서는 미국의 우수한 보수주의 인재들이 일한다.”

미국 최대 규모의 싱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 홈페이지에는 이런 설명이 붙어 있다.

놀라운 것은 이 헌사(獻辭)를 남긴 사람이 전직 대통령이나 저명한 학자가 아니라 극우보수파 라디오 정치토크쇼 진행자인 러시 림보(사진) 씨라는 점이다.

그러나 전국 660개 지방 라디오 방송을 통해 1450만 명이 최소한 주 1회 이상 그의 ‘보수 논리’를 청취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의문은 풀린다. 그는 보수적 시민 보병(步兵)의 이론 재무장을 주도하는 대표적인 전사의 반열에 올라 있다.

그의 토크쇼는 초대 손님이 없다. 혼자 마이크 앞에서 1인극을 벌이다가 청취자의 전화를 받고 대화를 나누는 식이다.

홍보용 비디오를 보면 그는 작은 스튜디오에서 공간을 향해 삿대질도 하면서 열정적으로 입심을 자랑한다. 그의 방송은 철저하게 민주당 때리기, 조지 W 부시 행정부 거들기로 일관한다.

1월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의 상원 인준청문회 다음날 림보 씨의 방송은 민주당 여성 상원의원인 바버라 박서 씨에 대한 성토장이었다.

전화를 건 청취자가 “박서 의원의 질문 자세가 무례했다”고 말을 꺼내자 림보 씨는 “그런 식의 태도로 라이스 씨의 인격을 모독한 것은 몰상식한 일이지만 라이스 씨의 침착한 답변 태도는 지도자답게 돋보였다”고 한술 더 떴다.

그는 부시 대통령의 ‘자유의 확산’ 구상이나 국기에 대한 맹세는 애국심 고취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처럼 이념적 대립 요소가 있는 이슈는 뭐든지 도마에 올리고 공화당 편을 든다.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은 백악관에 있을 때 “림보 씨를 잠재울 리버럴 방송인의 출현을 기대한다”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보수가 절대적으로 우세한 라디오 토크쇼 시장의 실지 회복에 나섰지만 사정이 간단치 않다.

민주당의 게리 하트 전 상원의원은 “진보주의자나 자유주의자는 흑백논리로 사안을 재단하지 못한다”면서 “단순 명쾌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논리를 전파하는 일은 그만큼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워싱턴=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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