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선택, 보수주의]<3>도마위 오른 진보주의

  • 입력 2005년 3월 8일 17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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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미국 민주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의 인기가 요즘 상승세다. 그런데 뉴욕타임스의 분석이 재미있다. 힐러리 의원이 지난해 대선 이후 동성결혼이나 낙태 같은 이슈 대신 신앙에 대한 존경심을 보여주면서 인기가 올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공화당 보수파인 존 매케인 상원의원과 ‘세속적 자유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아 온 힐러리 의원 사이에 무슨 입장 차이가 있느냐는 주장까지 나온다.

힐러리 의원의 ‘요즘 인기’는 미국 사회의 주류에서 벗어난 리버럴(Liberal)의 처지를 보여준다. 리 에드워즈 헤리티지재단 연구원은 “미국에서 리버럴은 더 이상 명예로운 단어가 아니다”고 말했다. 한국계로 미 상원 민주당 선거위원회 간사인 줄리 전 씨는 “리버럴이라는 이름의 값을 되찾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언제부터인가 리버럴은 사회의 주류에서 동떨어진 것 같은 이미지를 준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러나 한동안은 리버럴을 미국 사회의 주류로 되돌려놓기 힘들 것 같다. 최근 보수주의의 정치적 영향력은 수십 년에 걸친 보수주의 지지세력들의 ‘풀뿌리 사회운동’이 이뤄낸 결과이기 때문이다.》

▽풀뿌리 보수주의=지난달 17∼19일 워싱턴에서 열린 제32회 ‘보수주의자 정치행동 회의(CPAC)’는 보수주의 운동가들의 최대 잔치이자 연례 재무장 행사.

칼 로브 백악관 비서실 차장 겸 정치고문은 “앞으로 한 세대 동안 미국을 보수주의의 승전지로 만들겠다”고 장담했다. 보수주의 전사(戰士)들에게 던진 진군명령이었다.

민주당의 아성으로 꼽히는 할리우드, 공중파 TV 뉴스, 대학에 대한 비판도 빠지지 않았다.

‘대선 승리의 원인이 된 결혼의 중요성’이란 토론 시간엔 보수주의 운동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포커스 온 더 패밀리(Focus on the Family)’의 활동상이 소개됐다.

콜로라도 주 콜로라도스프링스에 있는 ‘포커스’ 본부에는 1300명이 근무하며, 매달 400만 통의 인쇄물을 가정에 배달한다. 12종의 잡지 230만 부를 발행하고 자체 제작하는 토크쇼 프로그램은 지방 라디오 방송을 통해 750만 명이 청취한다. 전화상담원 150명이 하루에 처리하는 상담만도 1만5000건이나 된다.

도널드 호들 포커스 대표는 “수백만 기독교인의 노력이 없었다면,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출현도, 공화당의 의회 장악도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조세개혁을 위한 미국인(ATR)’이란 단체는 ‘작은 정부’만이 미국식 개인주의 정신을 극대화한다고 믿는다. 하버드대 경영학석사(MBA) 출신인 설립자 그루버 노키스트 씨는 우선 우체국과 공립학교의 비효율 제거 방안을 끊임없이 전파한다. 또 국내총생산(GDP) 대비 32%인 정부 지출을 10년 후엔 16%로 낮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키스트 씨의 사무실은 부시 행정부 감세정책의 산실로 불릴 정도다.

전체 가구의 3분의 1 이상이 집에 사냥용 또는 호신용 총을 갖고 있는 미국에서 전국총기협회(NRA)의 공화당 지지는 선거 때마다 괴력을 발휘한다.

회원 400만 명의 NRA는 수정헌법 제2조가 허락한 ‘자기 방어를 위한 무기 소지 권리’를 제약해선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부시 대통령은 총기 제조사에 대해 소송 제한 조치를 취해 선거 때 진 신세를 갚았다.

60만 중소규모 자영업자의 모임, 중서부에 토지를 갖고 있지만 개발제한에 묶인 농민 조직 역시 보수주의 운동의 하부 조직 역할을 해 왔다.

미국은 신이 내린 축복의 땅이란 믿음에서 출발한 애국주의도 보수주의의 한 축을 이룬다. 2003년 초 미국기업연구소(AEI) 행사에서 벌어진 ‘사건’은 이런 기류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부시 대통령은 이날 존 애슈크로프트 법무장관에게 느닷없이 미국 국가를 부르라고 시켰다. 식순에도 없었고, 법무장관에게 국가를 부르라고 지시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었지만 애슈크로프트 장관은 주저 없이 노래를 불렀다. 워싱턴포스트는 당시 “이런 현상은 미국에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썼다.

▽미래를 고민하는 리버럴=2000년에 이어 지난해 대선에서 다시 패배한 민주당의 고민은 한 가지다. 두꺼운 보수의 벽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뚫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지난달 열린 하워드 딘 전 버몬트 주지사의 민주당 전국위원회(DNC) 의장 취임행사. 연사로 나선 존 에드워즈 전 민주당 부통령 후보는 “우리는 옳은 주장을 폈다. 공화당은 우리의 정신을 가로채 갔다”며 민주당의 단합을 촉구했다.

민주당은 전통적 지지층인 사회적 약자의 지지를 잃어가고 있다. 지난 대선의 결과도 그랬다. 진보와 보수의 구분은 더 이상 소득 수준이 아니라 유권자가 믿는 가치가 결정한다는 것이 ‘오른쪽으로(To the right)’를 쓴 제롬 힘멜스타인 앰허스트대 교수의 지적이다.

대선 직후 ‘캔자스 주는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책이 민주당 지지자의 눈길을 끌었다. 민주당 지지자인 저자는 캔자스 주 벽촌에 있는 공장지대 저소득 노동자들이 왜 ‘힘 있고, 부자 편인’ 공화당을 지지했을까 하는 의문을 던졌다.

텍사스주립대에서 정치철학을 가르치는 토머스 승 교수는 “미국의 중하층 소득자는 외국과 비교할 때 삶의 질이 그다지 나쁘지 않다”면서 “노력하면 사회의 주류로 올라갈 수 있다는 낙관주의가 저소득층의 공화당 지지를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대선 당시 만난 70대 쿠바계 미국인은 “존 케리 후보를 찍으면 연간 몇 백 달러의 현금이 더 생길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빠듯한 삶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며 “옳다고 믿는 후보를 버릴 순 없다”고 말했다.


워싱턴=권순택 특파원 maypole@donga.com

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신앙없는 학교 못보내” 公교육거부 확산▼

미국 버지니아 주의 소도시 퍼슬빌에 있는 패트릭 헨리 칼리지의 전교생 300명 중 약 90%는 공교육을 거부하고 집에서 공부하는 홈스쿨링(Home Schooling)으로 초중고교 과정을 마쳤다.

2000년 신설된 이 대학은 철저하게 보수주의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두면서 복음주의 기독교 지도자 양성을 교육 목표로 하고 있다. 학생들은 대부분 공직에 진출해 기독교적 보수사회를 건설한다는 꿈을 갖고 있다.

텍사스 주 휴스턴 출신인 공공정책학과 3학년 존 모니핸 씨는 부모의 뜻에 따라 초중고 과정을 모두 집에서 마쳤다. 나머지 형제 10명도 마찬가지.

10점을 만점으로 할 때 자신은 8∼9점 정도의 보수주의자라고 말하는 그는 “미국의 도덕성이 바닥에 떨어진 것은 아니지만 건국의 아버지들이 나라를 만들 때보다는 나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홈스쿨링을 하는 학생은 공식 통계로만 75만여 명. 그러나 정부의 역할을 불신하는 학부모들은 정부의 통계조사까지 거부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홈스쿨링을 하는 사람은 20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취학 대상자의 4%에 해당한다.

학교는 마약 폭력 섹스에 노출돼 있고, 기도 금지는 물론 반(反)기독교 신앙을 가르치는 곳이라 학교제도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데서 홈스쿨링은 출발했다.

모니핸 씨의 부모도 그랬다. 연말 학부모 모임에 간 모니핸 씨의 어머니는 ‘메리 크리스마스’ 대신 ‘해피 홀리데이’라고 인사를 건네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아 홈스쿨링을 시작했다는 것.

이 대학은 행정부 내 보수그룹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다. 지난해 백악관 인턴직원 100명 가운데 이 학교 재학생이 7명이나 포함됐다.

지도층의 우호적인 시선도 홈스쿨링의 기세를 높이고 있다. 릭 샌토럼 상원의원(공화·펜실베이니아 주), 메릴린 머스그러브 하원의원(공화·콜로라도 주)도 재택 교육 부모 명단에 올라 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2000년 대선 때 “텍사스에서는 재택 교육이 존중받고 보호돼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고 말했을 정도다.

버지니아=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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