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민의 투자여행]<7>나무보다 숲을 이해하라

  • 입력 2003년 4월 1일 18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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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난 아름다운 승복의 미덕 대신 온통 패자(敗者)의 추한 모습만 보였다. 동생은 열 받은 형 밑천 보태주다 밤을 새웠고, 아내는 넋 나간 남편 말리느라 잠을 잃었다. 계수와 아이들도 필경 잠을 설쳤으리라. 생각할 때마다 낯뜨거워지는 일이다. 나잇 값도 못하고 거기까지 가서 그 추태를….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다행한 일이 또 없다. 수업료 얼마 안 내고 천국에서 지옥으로 화끈하게 한번 추락해 봤으니까. 비교적 작은 판에서 일찌감치 한번 늘씬하게 얻어맞아 봤으니까. 그렇게 코피 안 흘려 보고 훗날 주식한테 바로 걸렸더라면 아마 코뼈가 부러졌으리라. 어쩌면 ‘저는 코피가 난 것도 아니고요, 코뼈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요, 완전히 안면이 함몰돼 버렸습니다’ 하는 신세가 됐을지도 모른다. 고집불통으로 정보만 믿다가 끝내 깡통을 차 버린 어느 방송 기자의 자조(自嘲)처럼 말이다.

이튿날 아침, 동생은 전날 남겼던 찬 음식 말고 따뜻한 아침을 제공했다. 그리곤 집으로 향하는 길에 끝으로 다시 한번 고수의 품격을 발휘했다.

반면에 난 지지리도 하수의 티를 냈다. 돈이 남았으면 좀 더 놀다 가자고 제의를 했던 것이다. 밥도 먹었겠다, 차에 기름도 가득하겠다, 이제 다 잃은들 어떠냐면서. 하지만 동생은 냉랭히 돌아서서 주차장을 향했다. ‘좀 아쉽다 싶을 때 그냥 일어서는 게 옳다’고 하면서.

명색이 형이 돼 가지고, 아, 상상만 해도 부끄러운 장면 아닌가. 어쨌든 난 그렇게 얼굴에 먹칠만 실컷 하고 웬도버를 떠나왔다. 공짜라고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블랙잭 같은 카드게임이 확률이 높다던데 슬롯머신만 했으니…. 한번만 더 하면 꼭 딸 것 같은데…. 남느니 소소한 미련뿐, 그날의 수치(羞恥)를 평생 채찍 삼아 살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한 채로.

며칠 후 시카고로 돌아가기 전날 밤, 난 동생을 졸라 기어이 블랙잭을 배웠다. 다음 기회엔 소위 종목을 제대로 택해서 꼭 설욕을 하겠노라고 말이다. 문제는 종목이 아니라 원리라고 그때라도 좀 따끔하게 일깨워주지…. 동생은 그냥 이모저모 그 게임만 설명해 줬다. 그리곤 ‘형님 니는 이런 거 되도록 안 하는 게 좋겠다’는 짤막한 코멘트와 함께 수업을 끝냈다. 도박이 권장할 일도 아니지, 또 일전에 내 실력도 봤지, 난 그게 그래서 하는 소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 말속엔 뼈가 있었고, 그 뜻은 근 10년이 지나서야 밝혀졌다. 2001년 12월 애틀랜틱시티 블랙잭 테이블, 난생 처음 동생하고 무공을 겨뤄보는 자리에서.

김지민 시카고투자컨설팅 대표 cic2010@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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