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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참회록]2부 ②지역주의의 벽/김영춘 의원

입력 2003-09-16 18:34업데이트 2009-10-10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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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수기자서영수기자
대통령선거를 1주일쯤 앞둔 지난해 12월 초 부산 금정구 부산대 지하철역 앞. 1000여명의 청중을 향해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의 선거유세단이 한 표를 호소하고 있었다.

“전라도는 90% 이상이 뭉쳤습니다. 손놓고 있다가 당하면 또 5년입니다. 우리도 뭉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래고래 목청을 높이는 동료 연사의 연설을 듣던 김영춘(金榮春) 의원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부산으로 향하기 전 지역구 지지자들에게 했던 ‘유세 도중에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발언이 나오면 앞장서 막겠다’는 다짐이 머리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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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 청중은 ‘옳소’하며 맞장구를 쳤지만 자발적으로 참석한 진짜 청중은 냉담했다.

“창피하고 답답한 생각에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연단에만 올라가봐라 하고 별렀죠. 하지만 정작 연단에 올라가서는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발언을 한마디도 비판하지 못했습니다. 동원 청중의 열광적 분위기에 맞설 엄두가 안나 오히려 ‘이 후보 인물론’을 거론하며 변죽만 울렸습니다. 연설을 마친 뒤 지하철역으로 들어서는데 졸업 후 처음 만난 고교 동창생이 다가오더니 ‘실망했다. 그렇게 지역감정이나 선동해서야 되겠느냐’며 싸늘한 표정을 짓더군요.”

16일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2시간여 동안 가진 인터뷰 내내 김 의원은 ‘지역주의 벽’ 앞에 고개를 숙여야만 했던 부끄러운 기억을 털어 놓으면서 가슴을 쳤다.

“‘표를 얻기 위해서는 상투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정치현실”이라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차마 이 말을 못하고 친구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같은 패거리가 내는 소리를 방관자처럼 듣고 있었으면서도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죠.”

김 의원은 실제 자신이 지역감정의 수혜자이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2000년 총선을 1개월쯤 앞둔 어느 날, 지역구(서울 광진갑)의 한 동네 어귀에서 만난 50대 후반의 유권자는 그가 인사를 건네자 “한나라당 후보면 부탁할 필요도 없다”고 퉁명스럽게 답했다.

놀란 그에게 이 유권자는 “김대중이 싫어서 난 무조건 한나라당이오. 전라도 정권에 표 찍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마시오”라고 말했다.

김 의원은 별 수 없이 이 유권자의 ‘호의’를 삼켰다.

“선거 때만이 아니에요. 평상시에도 호남과 영남 출신 설렁탕집까지 단골이 확연히 구별돼요. 따뜻한 이웃이어야 할 주민들이 지역주의 때문에 원수처럼 패가 갈려 있는 겁니다. 민주당 커뮤니티와 한나라당 커뮤니티가 아랍과 이스라엘 민족처럼 원색적이고 배타적으로 대립하는 ‘악성 지역주의’는 시급히 극복돼야 합니다.”

김 의원은 지역주의가 국회에서도 파행과 대결을 부추긴다며 안타까워했다.

“2000년에 이어 2001년 정기국회에서도 10여일간 공들여 준비했지만 두 번 모두 대정부 질문을 못했습니다. 한나라당의 영남 출신 의원과 민주당의 호남 출신 의원이 원색적 비난과 욕설로 맞붙는 바람에 본회의가 파행됐기 때문이죠. 속이 상해 불씨를 제공한 영남 출신 선배 의원에게 ‘그렇게 하면 지역구에서 좋아하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거침없이 ‘잘했다, 속이 시원하다고들 그런다’고 답하더군요.”

김 의원은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발언을 지역구민들과 당 지도부가 비판하기는커녕 오히려 격려하고 부추기는 풍토가 계속되는 한 악성 전염병 같은 지역주의의 악순환의 고리는 끊을 길이 없다”고 개탄했다.

박성원기자 swpark@donga.com

▼김영춘 의원은▼

고려대 총학생회장 출신의 초선의원(41세). 1984년 민정당사 점거농성사건을 배후조종한 혐의로 구속됐고, 출감 후 1년 가까이 노동운동도 했다. 87년 김영삼(金泳三)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 비서로 정계에 입문해 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일하다가 96년 15대 총선에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해 분패했다. 이후 2000년 16대 총선에서 당선됐다. 당 쇄신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7월 초 동료의원 4명과 함께 탈당해 통합연대를 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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