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디팩트] 고대 로마 유적과 고흐의 예술혼이 살아 있는 ‘아를’

  • 입력 2015년 10월 23일 15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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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부 리비에라(망통, 모나코, 니스, 칸, 생폴드방스, 앙티브, 마르세유) 해변을 따라 이어진 도시들을 여행하고 약간 프랑스 내륙으로 올라서면 아를(Arles)과 아비뇽(Avignon)이다.

9월 하순 늦은 오후 아를에 도착하니 론강의 강물이 ‘귀를 자른’ 고흐와 ‘아를의 여인’에 반해 자살한 20살 청년의 비극을 담은 듯 잔잔히 흐르고 있다. 강가를 따라 시가지로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론강 옆에는 복지 쿠폰으로 유람선 여행을 다니는 관광객을 싣고 다니는 대형 페리호가 정박해 있다.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고흐(1853~1890)는 파리 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1888년 아를로 옮겨왔다. 그가 머문 기간은 불과 15개월이었으나 아를의 ‘노란 집’에 머무르며 일생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들을 그렸다. 자살하기 직전까지 생의 가장 격정적인 시기를 보내며 아를의 여인과 남프랑스적 풍경을 캔버스에 담았다. <아를의 여인>, <추수>, <씨 뿌리는 사람>, <론강의 별>, <아를의 도개교>, <아를의 원형경기장>, <아를의 무도회장>, <별이 빛나는 밤>, <아를의 포럼 광장>, <밤의 카페> 등 200점이 넘는 엄청난 양의 그림이 아를에서 쏟아져 나왔다.

알퐁스 도데(1840~1897)의 소설 ‘아를의 여인’의 배경도 아를이다. 어찌 보면 평범한 작품이 될 뻔했지만 조르주 비제(1838~1875)가 이를 테마로 ‘아를의 여인’이란 관현악모음곡을 작곡함으로써 한층 유명해지게 됐다. 남자 주인공 장은 밝고 쾌활한 성격의 지주의 아들로, 투우장에서 처음 본 아를의 여인을 사랑했으나 여인에 대한 소문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안 부모의 부모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한다. 어느날 한 남자가 찾아와 자신이 그녀와 2년간 동거한 사람이라며 장은 그녀와 결혼할 수 없다고 말하고 간다. 마음의 상심이 깊어지더니 어느날 지주들의 수호신인 ‘성엘로아’의 축제에서 녹초가 되도록 춤을 추고 돌아와 이튿날 새벽 높은 다락에서 안마당의 포석 위로 몸을 던져 숨진다.

아를은 프랑스 남부 론강의 하류에 위치해 있다. 고대 로마 유적이 즐비한 곳으로 도데, 고흐, 비제가 한창 활동할 시기에는 꽤 번창한 도시였다.

고흐는 파리를 떠나 아를에서 고갱과 함께 화가 공동체라는 이상을 실현하려 했다. 그러나 둘은 극심한 기질 차이와 예술에 대한 견해 차이로 2개월 만에 갈라서게 된다. 냉소적인 고갱과 달리 불 같은 성격의 고흐는 자기파괴적인 행동으로 급기야 자신의 귀를 자르게 되고 자살에 이르고 만다.

론강가를 걷다가 왼쪽으로 틀면 시내로 들어가는 초입에 성줄리앙수도원(Eglise St. Julien)이 보인다. 1490년에 처음 지어진 후 1648년과 1660년에 증개축한 오래된 성당이다. 이것말고도 이름 모를 허물어진 성채와 크고 작은 성당이 헛헛한 외로움을 불러일으킨다. 레아튀미술관(Musee Reattu), 콘스탄틴 공중목욕탕(Thermes de Constantin), 양모(羊毛)협동조합을 지나갔다.

레아튀미술관은 아를 태생의 화가 자크 레아튀(Jacques Reattu)의 집안벽화(housing painting), 피카소의 드로잉(drawings), 다양한 조각과 사진을 보유하고 있으며 정기적으로 현대미술(contemporary art) 전시회가 열린다.

콘스탄틴 공중목욕탕은 론강 강가 레아튀미술관 맞은 편에 위치한 로마시대의 대형 욕탕이다. 당시 론강의 물을 가져와 장작으로 물을 끓여 썼으며, 귀족들의 사교의 장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훼손이 심해 오래 머물진 않았다. 콘스탄틴이란 이름이 붙은 것을 보면 로마 콘스탄티누스 황제(274~337)가 재위할 당시(306~337년)에 지어진 듯하다. 그는 기독교를 포용해 장차 로마 국교로 받아들이는 계기를 열어줬다.

이 곳을 지나 반고흐재단에 도착했다. 1962년에 설립된 이곳은 실상 고흐의 그림을 단 한 점도 소장하지 못했지만 ‘고흐’를 주제로 한 다른 작가들의 창의성이 돋보이는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현대화가들에게 고흐를 연상시키는 다양한 작품들을 제작하도록 유도하고 이를 수집해 전시하는 일도 하고 있다. 모사본과 도서, 포스터, 기념품 등을 판매하고 수익금으로 각종 고흐 기념사업을 한다.

이 곳에서 반경 1㎞ 안에, 걸어서 5분 안에 아를의 핵심이 다 들어 있다. 고대 포럼의 지하비밀통로(Cryptoportiques)을 지나 레퓌블리크광장(Place de la Republic)에 도착했다. 중앙에 낡은 사암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 이집트서 약탈해온 것은 아니다.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뒤에 시청(Hotel de Ville), 시청 왼편에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생안느교회(Chapelle Saint Anne)교회, 오른편에는 생트로핌수도원(Eglise de St.Trophime)이 자리잡고 있다.

생트로핌수도원은 공사가 한창이다. 한적한 분위기에 몇 안되는 관광객이 오가고 벤치나 돌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풍경이 여유롭다기보다는 왠지 고적함을 더한다.

이밖에 광장주변에는 아를라탕박물관(Musee Arlaten), 기독교미술박물관(Musee de Art Chretien), 이교도미술박물관(Musee de Art Paien)이 자리잡고 있다.

광장에서 가까운 고대극장(Theatre Antique, 사진 위)에 들렀다. 늦은 오후 시간이라서 그런지, 공사가 진행 중이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어쨌든 입장 불가다. 기원전 1세기 로마 아우구수투스 황제 때 건설됐으며 1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이다. 반원형의 계단식 좌석이 무대를 내려다보고 있다. 처음 세워졌던 기원전 1세기 경에는 대리석 기둥 뒤로 무대의 벽이 높게 둘러쳐 있었지만 지금은 벽은 허물어지고 몇 개의 기둥만 남아 있다. 단지 주변의 소박한 노천 카페와 상점들이 여행객에게 푸근하게 다가온다.

고대극장은 19세기에 원형경기장(Amphitheatre)과 함께 복원되었지만 여전히 보존상태가 좋지 않다. 이곳에서 아를의 비너스도 함께 발굴됐는데 현재 파리 루브르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그럼에도 고대극장은 아를 축제 기간이 되면 콘서트나 오페라 등이 열리는 야외공연장으로 본연의 임무를 다한다고 한다. 요즘에는 젊은 연인들이 사랑을 고백하는 곳으로 애용한다니 고대와 현대를 이어주는 낭만스런 정경이 아닐 수 없다.

고대극장 옆엔 아를의 하이라이트인 원형극장이 자리잡고 있다. 60개의 아치로 돼 있는 로마시대의 원형투기장으로 로마의 콜로세움과 비슷하다. 프로방스지역에서 가장 잘 보존된 로마시대 유적으로 지금은 1, 2층만 남아 있지만 원래는 3층으로 훨씬 규모가 컸다. 직경은 136m, 한꺼번에 1만2000명 가량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곳에서 로마시대에는 검투사 노예를 동원해 피비린내 나는 경기를 벌이게 했다. 지금은 부활절에서 9월까지 투우 경기가 열린다. 전망대에서는 사방으로 펼쳐진 아를의 시내 풍경을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아둘 수 있다.

원형극장 근처엔 노틀담대성당(Notre Dame de la Major)이 있다. 근처엔 공동묘지도 있다. 이 곳에서 고대극장 뒤편으로 돌아가니 파스텔톤의 노스탤지어가 느껴지는 식물원인 여름정원(Jardin de Ete)이 있다. 늦은 시간이라 들어가 보지 못했지만 구글로 본 이미지 몇 장이 아름답다. 이어 생블레즈수도원(Eglise St.Blaise)을 지나 반고흐카페가 있는 포럼광장(Place du Forum)에 도착했다. 아를 시내서 가장 번화한 곳이지만 아주 좁은 구역이다.

반고흐카페(사진 아래)는 고흐의 그림인 <별이 빛나는 밤>, <아를의 포럼 광장>, <밤의 카페> 등의 배경이 된 곳이다. 카페 안에는 고흐가 1888년 아를에 머무를 때 그린 그림의 모사품이 전시돼 있고 당시처럼 지금도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다. 고흐가 그린 그림 속 아를의 풍경을 마음 속에 담아두려 노력하며 차 한잔과 오믈렛을 시켰다. 시장기가 돌았는데도 맛이 명소의 이름값에 걸맞지 않다.

이밖에 아를엔 고호가 그린 도개교, 반고흐광장(Espace Van Gogh) 등 고흐의 흔적이 있다. 반고흐광장은 고흐가 정신치료를 받았던 병원과 인근의 정원을 묘사한 그림 <정신병원의 정원>(Le jardin de la maison de sante, 1898년 4월)을 그대로 복원해 조성한 곳이다.

늦게 아를에 도착해 주마간산 격으로 서둘러 아를을 둘러봤다. 시내에서 벗어나 숙소가 있는 아비뇽으로 돌아가는 길에 석양이 지는 론강가를 따라 걸었다. 고대 로마의 옛 열정과 아를의 아름다움과 회한이 뒤섞여 강물이 흘러간다. 더 공부하고 갔으면 음미할 게 많았을 아쉬운 아를 여행이었다.

취재 = 정종호 엠디팩트 기자 md@mdfac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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