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암 연구 25년 백순명 소장 “23년전 유방암 유전자 눈으로 확인, 지금도 짜릿”

  • Array
  • 입력 2011년 7월 11일 03시 00분


코멘트
삼성서울병원 암연구소에서 만난 백순명 소장.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암세포 유발 유전체와 매일 전쟁을 치르고 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삼성서울병원 암연구소에서 만난 백순명 소장.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암세포 유발 유전체와 매일 전쟁을 치르고 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백순명 삼성암연구소장(54)은 지난해 유방암 연구의 최고 영예인 ‘코멘 브링커상’을 받아 세계적인 병리학자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그는 현재 미국 국립유방암임상연구협회(NSABP) 병리과장으로도 일하며 한국과 미국을 오가고 있다. 병리학 전문가는 직접 진료나 수술을 하지 않아 환자에게 낯선 분야다. 하지만 최고의 의사 뒤에는 병리학 전문가의 공로가 숨어있다. 암인지 아닌지, 암의 종류가 무엇인지, 어떤 치료법을 적용할지는 병리 의사가 진단을 내린다.

백 소장은 1981년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미 국립암센터와 조지타운대 병리과 교수를 지냈다. “지금까지 5만 건의 조직 슬라이드를 봤다”는 백 소장으로부터 생애 최고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 HER2 암세포에 염색한 순간

“1988년 HER2 유전자를 확인한 순간 아닐까요. 짜릿했습니다.”

유방 조직을 들여다보면 나뭇가지에 포도송이가 달린 것처럼 보인다. 정상세포는 이런 규칙성을 가지고 가지런히 배열돼 있다. 반면 암세포는 모양이 제멋대로인 데다 세포핵이 비정상적으로 커져 있다. 백 소장은 한마디로 “암세포는 못 생겼다(ugly)”고 말했다.

백 소장은 그날 실험실에서 유방암 세포 가운데 하나인 HER2 유전자에 반응하는 항체를 갈색으로 염색하는 데 성공했다. 유방암 환자의 20%가량은 HER2 유전자의 수가 늘어나 있다. 정상세포가 아니라 암세포에만 HER2 유전자가 늘어나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뒤부터 암세포만 골라 제거하는 표적 치료제 개발에도 탄력이 붙었다.

“염색에 성공한 뒤 곧바로 HER2 유전자에 이상이 나타난 수백 명의 유방암 환자의 병력을 확보해 기록을 추적했습니다. 암세포가 갈색으로 염색된 환자는 빨리 사망하고, 염색이 잘 안된 환자는 오래 산다는 것을 밝혀냈죠.”

그 후 백 소장은 HER2 표적 치료제인 ‘허셉틴’ 3차 임상시험을 주도했고 초기 유방암 환자가 허셉틴 주사를 맞으면 재발률이 50%로 줄어든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 유방암 진단 키트도 개발

백 소장은 25년간 유방암 진단법과 치료제 개발에 몰두했다.

2004년 백 소장은 ‘온코타입DX’라는 유방암 유전자 진단 키트를 개발했다. 유방암과 관련 있는 유전자 250개 가운데 암의 예후를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21개 유전자를 골라 이 진단 키트로 반응을 살펴볼 수 있다. 결과에 따라 유방암 환자 가운데 항암치료를 받을 환자와 항호르몬 치료로 충분한 환자를 가려낸다.

“초기 유방암 환자 중 50% 이상이 항암치료를 받지 않아도 암이 재발하지 않습니다. 온코타입은 환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불필요한 치료를 막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온코타입은 미국에서 유방암 치료의 표준으로 채택돼 최근 6년간 20만 명 이상의 환자가 사용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가격이 비싸 아직 진료 현장에 보급되지 않고 있다.

○ “암 세포, 예상보다 똑똑하다”

연구실에서 백 소장과 함께 조직 슬라이드를 들여다보았다. 정상세포와 암세포는 뚜렷이 구별됐다. 현미경 밖 세상과 달리 현미경 속 세상은 선과 악이 명확해 보였다. 그러나 백 소장은 “적의 실체가 보이는데 싸우기는 어렵다. 암세포가 너무 똑똑하다”고 말했다.

암 치료제는 날로 발전하고 있다. 암세포가 주변 조직을 파고드는 것을 막거나 세포핵 분열을 억제하는 등 암이 퍼져가는 과정을 하나씩 차단하는 것이다. 이런 표적 치료제를 쓰면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하지만 백 소장은 “연구를 거듭할수록 희망만큼 절망도 커진다”고 말했다. 암 연구자들이 처음 유전자 테스트로 암을 들여다봤을 때는 암세포란 간단히 한두 개 유전자가 돌연변이를 일으킨 것으로 생각했다. 돌연변이 몇 개만 찾으면 암을 예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최근 들어 염기서열 분석법으로 암세포를 들여다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암 유전자가 복잡하게 망가져 있었다. 염기서열도 헝클어져 있고 숫자도 늘어나고 도대체 어느 유전자에서 돌연변이가 일어나 암이 발생할 것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고 했다. 백 소장은 “이제 새로운 시각에서 암 연구를 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환자마다 돌연변이를 일으킨 유전자가 다르다. 환자마다 ‘맞춤형’ 임상시험을 하고 ‘맞춤형’ 약을 개발할 시기가 오고 있다는 것이다.

백 소장은 삼성암연구소에서 한국형 유방암 진단 키트를 개발하고 신약 임상 연구 방법을 구상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한국의 암 연구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도 드러냈다. 뒤에서 묵묵히 일하는 병리학에 대한 지원이 미국에 비해 훨씬 부족하다는 것.

“2009년부터 삼성암연구소장을 맡게 된 것은 열심히 일하는 후배 임상 연구가들의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이젠 유전자와 염색체에 기반한 암 임상이 완전히 다시 시작되는 단계입니다. 한국 의사들도 충분한 경쟁력을 지녔습니다.”

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