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의 어느 날 성형외과가 밀집한 서울 강남의 한 거리. 한 여성이 성형외과 출입구에 걸린 플래카드를 보면서 뭔가를 열심히 메모하고 있다. 이 여성은 곧 다른 병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서 또 뭔가를 메모했다. 그건 쌍꺼풀 수술비용이었다.
1월까지만 해도 병원들은 이런 비용을 대외적으로 공개하지 않았다. 칼을 대지 않는 쌍꺼풀 수술법인 매몰법은 비용이 대략 100만∼150만 원이었다. 그러나 병원마다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에 가격을 비교하려면 일일이 상담을 받아야 했다. 그랬던 것이 이제는 병원 입구에 내걸린 플래카드만으로도 비교가 가능해진 것이다. 이 여성은 결국 90만 원의 최저가를 제시한 병원으로 들어갔다.
이 가상의 시나리오가 곧 현실이 된다. 31일부터 병원은 인터넷 홈페이지에, 의원은 병원 안에 비치된 책자에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진료 항목과 각각의 진료비를 공개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통령 직속 규제개혁위원회 행정사회분과위원회는 최근 비급여 진료비를 일반에게 고지하도록 의무화하는 내용의 의료법 개정안을 심의, 의결했다.
○ 위반 땐 300만 원 과태료-15일 영업정지
앞으로는 비급여 진료비를 인터넷을 통해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 비급여 진료비는 병원마다 천차만별이었지만 공개돼 있지 않아 환자는 어느 병원이 비싸고 어느 병원이 싼지 알 수 없었다. 자기공명영상(MRI) 촬영, 컴퓨터단층촬영(CT), 성형수술, 피부과 진료가 여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앞으로 MRI를 촬영하려는 환자는 서울아산병원,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서울대병원 등 각 병원의 홈페이지에서 MRI 진료비를 찾아본 뒤 가장 싼 병원을 선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동네의원도 비급여 진료비 명세를 모두 적어놓은 책자를 비치해야 한다. 규모가 작은 동네의원의 경우 인터넷 공개는 원하는 곳만 자율적으로 하게 된다. 동네의원에까지 인터넷 공개를 강요하면 과도한 경쟁이 우려된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또 의원들은 비급여 진료비 명세를 책자로 만드는 대신 벽에 붙이는 포스터나 간단한 소형 인쇄물로 대체할 수 있도록 했다. 이를 위반하면 시정명령을 내리고 벌금 300만 원의 과태료나 영업정지 15일의 행정처분을 받을 수 있다.
○ 진료비 비교 사이트 생길 수도
성형외과 피부과 안과 등 비급여 진료가 많은 병원들 사이에 환자를 유치하기 위한 가격 할인 경쟁이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개정안에 따르면 병원 간판에는 가격을 공개하지 못한다. 그러나 플래카드나 벽보 형태로 외부에 공개하는 것은 상관이 없다. 이 때문에 경쟁 병원보다 싼값에 진료비를 제시할 가능성이 커졌다.
일부에서는 병원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오히려 병원의 수익성이 악화될 수 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서울 강남의 C성형외과는 “비슷비슷한 성형외과가 모여 있는 이곳에서는 낮은 가격을 제시하는 곳으로만 환자가 몰릴 수 있다”며 “지금 가격을 그냥 내걸기도, 가격을 더 낮추기도 곤란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또한 병원 간 진료비를 비교하는 웹사이트가 생길 수도 있다. 컴퓨터를 살 때 가격비교 사이트에 들어가 가장 싼 인터넷쇼핑몰을 찾아내 구매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윤순 보건복지가족부 의료자원과장은 “환자가 진료비를 예측할 수 있고 형편에 맞는 병원을 골라 갈 수 있다”며 “환자의 알 권리를 좀 더 충족시켜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대형 병원들은 난감한 표정이 역력하다. A대학병원 관계자는 “공개해야 할 진료비 항목이 수천 개에 이를 수도 있어 준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MRI의 예만 들더라도 병원마다 쓰는 기계가 모두 다른데 단순한 가격 정보가 환자에게 큰 도움이 될지 의문이다”라고 말했다.
○ “가격 공개 자율 운영” 주장도
대한의사협회는 의료법 개정안이 입법 예고된 지난해 11월 반대 의견을 밝힌 바 있다. 병원 간에 지나친 경쟁이 생길 게 뻔하고, 그에 따라 지역 의료기관의 기반이 붕괴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환자의 알 권리도 중요하지만 자칫 현재의 의료 시스템마저 흔들릴 수 있다는 것.
이번 조치로 환자들의 의료비 지출이 줄어들 것이란 전망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도 적지 않다. B대학병원 관계자는 “환자들이 병원을 고를 때는 의사의 실력이나 병원과의 거리 등 여러 요소를 고려한다”며 “의료비가 병원을 선택할 때 큰 요소가 아니기 때문에 실제 이 조치가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가격 공개를 강제가 아닌 자율로 운영할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양훈식 대한의사회 보험이사는 “환자의 알 권리를 보장한다는 취지는 공감하지만 병원마다 건물 유지비, 기계의 종류 등 원가가 다르다”며 “강제보다는 자율로 운영해도 공개하지 않는 병원은 자연스럽게 도태될 것”이라고 밝혔다.
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 김윤정 인턴기자 연세대 주거환경학과 3학년 김유나 인턴기자 숙명여대 언론정보학부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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