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사회의 새좌표]철학/삶의 문제로 관심 이동

  • 입력 2000년 4월 3일 19시 22분


《정보화와 세계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시공간에 대한 인식 변화에서 사회구조와 세계질서의 개편까지 인간의 삶 전반에 급격한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해답을 찾기 위해 논의를 진행하고 있지만 누구도 분명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현재의 사회변동에 대한 학계 각 분야의 쟁점과 전망을 9회에 걸쳐 살펴본다. 》

현대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문화적 지각변동은 학계의 지형도마저 바꿔놓고 있다. 철학도 예외가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한때 후기자본주의의 문화적 현상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유일한 학문적 패러다임으로 맹위를 떨쳤지만, 유행의 거품이 지나간 지금 생산적 논의는커녕 그 문제의식마저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이데올로기 시대의 종말과 함께 몰려왔던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양한 담론들로 대체되고 있다. 영상시대, 인공지능,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아시아적 가치, 페미니즘, 생태사상의 담론들은 서로 중첩되기도 하고 교차되기도 하지만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정착할 수 있는 중심을 결여하고 있다.

▼급격한 사회변동 다양성 증가▼

이런 맥락에서 보면 철학에서 일어나고 있는 지각변동은 이념적 중심의 해체와 다양한 문제들의 표출로 서술될 수 있다. 모든 것을 하나의 의미로 환원하는 거대이론에 대한 신뢰의 상실은 이제 철학연구의 당연한 전제가 된 것이다. 오늘날 다양한 영역에서 전개되는 철학적 연구들은 더 이상 하나의 ‘중심’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한때 다양한 갈래의 철학적 논의들을 하나의 중심으로 모았던 실존주의, 마르크스주의, 현상학, 비판이론, 분석철학은 이제 역사적 의미만 가질 뿐 거대이론으로서의 영향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 이전의 철학이 보편적 이념과 사상을 연구했다면, 오늘의 철학은 급격한 사회변동이 빚어낸 문제들의 의미를 해명한다. 철학적 관심의 축은 ‘이념’에서 ‘문제’로 옮겨지고 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지각변동의 특징은 이처럼 중심이 없다는 것이다. 문제의 ‘중심’이 없다는 것이 현대의 철학적 ‘문제’이기 때문에 지금의 철학적 조류는 대개 다양한 문제들의 지형도를 그림으로써 사회적 문화적 지각변동의 ‘의미’를 성찰하려고 한다. 철학적 문제들은 특히 세 가지 지각변동의 방향에 따라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다.

첫째, ‘정보화’의 지각변동은 인간 상호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현실과 가상의 의미도 급격하게 변화시키고 있다. 예컨대 인터넷(Inter-net)은 한편으로는 가상공간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망’(net)을 가능하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의미 있는 구체적 관계의 ‘사이’(inter)를 파괴한다. 인터넷은 인간상호간의 관계를 넘어서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까지 바꿔놓는다는 점에서 새로운 철학적 성찰을 요구한다. 가상현실, 미디어, 사이버 스페이스에 대한 관심의 고조는 이런 시대적 요청을 반영한다.

둘째, ‘생명공학’에 의한 지각변동은 환경오염 및 생태계의 파괴와 함께 시작된 생명에 관한 철학적 성찰을 심화시킨다. 오늘날 과학기술은 그 지배영역을 외면적 자연으로부터 내면적 생명에로 점차 확대하고 있다. 생태학적 문제가 윤리의 대상을 인간 상호간의 관계에서 자연으로 확대하는 데 기여하였듯이 유전자조작 및 생명복제 기술은 ‘생명’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최근 활발하게 연구되는 환경윤리, 의료윤리, 생명사상의 밑바탕에는 인간실존의 의미에 대한 불확실성이 짙게 깔려 있다.

셋째, ‘세계화’의 지각변동은 전세계를 하나의 단일시장으로 변화시킨 후기 자본주의의 야만성에 대항할 수 있는 이념적 대안을 모색하도록 한다. 세계화는 국가와 민족간의 장벽을 낮추는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빈부의 격차, 남북갈등, 문명의 충돌과 같은 부작용을 야기한다. 이런 맥락에서 경제논리만이 지배하는 ‘세계시장’의 문제점을 이성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세계시민사회’가 요구되고 있다. 만약 이러한 세계시민사회가 궁극적으로 다양성을 존중하는 공생의 이념을 추구한다면, 문화다원주의는 앞으로 경제적 세계화에 대항할 수 있는 자원으로서도 깊이 성찰될 것이다.

▼생명-환경윤리 연구 활발▼

물론 이러한 지각변동을 사상으로 포착하려는 철학적 시도에는 어떤 이론적, 이념적 중심도 보이지 않는다. 어떤 철학적 문제들의 지형은 뚜렷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어떤 지각변동은 단지 어렴풋이 포착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회의 지각변동에 따라 문제를 포착하고 의미를 밝히는 철학적 의식의 더듬이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시도를 조소하듯이 사회는 더욱 급박하게 변화하고 또 철학과 인문학자들에게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강요하지만, 사회의 중심이 불투명해질수록 철학에 대한 시대적 요청은 강화될 것이 틀림없다. 문제의 중심이 없다는 것이 현대사회의 철학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진우<계명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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