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보좌 무보수 직책 대신 인삼 80근 거래權… 화포-화약 ‘위험한 거래’도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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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잡史]<역관>

조선 사신단이 청나라 연경성의 동문인 조양문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린 연행도(燕行圖).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제공
조선 사신단이 청나라 연경성의 동문인 조양문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린 연행도(燕行圖).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제공
“저 역관(譯官)들은 자기들의 목전 이익만 탐하고 국가의 장구한 계책은 알지 못하여, 수십 년 이래 밤낮 오직 당전의 통용을 소원하고 있다. 이는 그야말로 ‘화살 가는 데 따라 과녁 세우기’나 ‘언 발에 오줌 누기’와 다를 바 없다.”(박지원 ‘연암집’에서)

조선은 정기적으로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사행(使行)을 통해 외교를 이어갔다. 한 번에 보통 300명 정도가 의주에서 압록강을 넘어 요동을 거쳐 북경에 이르는 길을 다녀왔다. 역관은 사신을 보좌하며 통역을 비롯해 현지 관리와 접촉하는 실무를 맡았다. 그러나 정기 급료나 먼 길을 오가는 데 필요한 경비는 전혀 받지 못했다. 대신 나라에서는 역관에게 한 사람이 짊어지고 다닐 만한 분량인 인삼 여덟 자루(약 80근)를 거래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는데, 이것이 팔포제(八包制)다.

조선의 인삼은 중국과 일본에서 만병통치약으로 불릴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1682년(숙종 8년) 당시 인삼 1근이 은 25냥 정도였으니, 인삼 80근의 값어치는 은 2000냥에 달했다. 그러나 역관이 사행에 끼는 기회를 잡기는 쉽지 않았다. 사역원(司譯院)에 소속된 역관이 600명이 넘는 데 반해 실제 업무를 수행하는 인원은 70여 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역관들은 인삼을 팔고 비단, 모자 등 사치품을 국내에 사들여와 되팔아서 부(富)를 쌓았다. 오자(誤字)가 적은 좋은 판본의 책이나 희귀한 서적도 역관이 들여왔다. 특히 중국 비단은 혼수로 인기가 높아 시골의 부녀자까지 필요로 했다. 이옥(1760∼1815)은 ‘동상기(東廂記)’에서 혼수로 일본산 경대와 러시아산 금갑경을 소개했는데 이 역시 역관이 들여온 물건이다. 중국이 수출을 금지한 화약(염초, 유황)이나 중국 지도, 화포(火砲)까지 몰래 들여오기도 했다. 발각되면 사형을 당할 수 있는 위험한 거래였다.

사행단은 보통 북경에서 2개월 정도 머물렀는데, 중국 상인들은 조선 사람들이 돌아갈 기일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상인들은 구매 시기를 늦추기로 담합해 인삼값을 폭락시키기도 했다. 역관들이 힘들게 가져온 인삼을 도로 조선으로 가져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줄다리기 끝에 승리한 역관들은 큰 부자가 되었고, 대를 이어 역관을 배출했다. 대표적인 가문으로 밀양 변씨, 인동 장씨, 천령 현씨, 해주 오씨가 있다. 17, 18세기 조선의 큰 부자들은 역관 가문에서 나왔다. 박지원의 ‘허생전’에서 허생에게 선뜻 1만 냥을 빌려준 ‘변 부자’도 역관 출신으로 한양 갑부였던 변승업의 할아버지다.

1680년 청과 일본이 직접 교역을 시작하고, 1707년 책문후시(柵門後市)가 열리며 역관의 수입은 점차 줄었다. 가난한 역관들은 자신들이 지닌 팔포(八包)의 권리를 개성이나 평양의 상단에 팔아넘기거나 아예 다른 일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19세기 들어서는 예술에 전념하거나 중국 문인과 직접 교유하며 인정받은 역관들도 나왔다.

김동건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수료
#역관#조선 사신단#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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