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605>卷七.烏江의 슬픈 노래

  • 입력 2005년 11월 5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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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너는 항복하면 살려준다고 속이고 사로잡은 진나라의 젊은이 20만을 신안(新安)에서 산 채로 땅에 묻었다. 그러고도 그 장수들은 살려 삼진(三秦)의 왕으로 세웠으니 그 모질고 끔찍한 짓이 네 여섯 번째 죄다.

너는 또 여러 제후의 장수들을 좋은 땅의 왕으로 세우고, 원래의 제후와 왕들은 다른 곳으로 쫓아내었다. 그리하여 그 장수들로 하여금 다투어 제 주인을 저버리게 만들었으니, 그 죄가 일곱 번째이다.

너는 의제(義帝)를 팽성에서 쫓아내고 스스로 그곳에 도읍하였다. 거기다가 한왕(韓王)의 봉지(封地)를 빼앗고, 양(梁) 땅과 초나라를 합쳐 자신의 땅을 넓혔으니 그 죄가 여덟 번째이다.

의제께서는 양치기에서 몸을 일으키셨으나, 어김없이 초 왕실의 적통(嫡統)이요, 온 초나라 백성들이 회왕(懷王)으로 떠받든 분이셨다. 그런데 너는 의제를 강남으로 내쫓고도 모자라 사람을 보내 강물 위에서 무참히 돌아가시게 하였으니 그 죄가 아홉 번째이다.

너는 신하된 자로서 임금을 시해하였으며, 장수되어서는 이미 항복한 사람들을 함부로 죽였다. 패왕으로서 크게 천하에 걸터앉았으면서도 그 다스림은 공정하지 않고 약조를 어겨 신의를 저버린 것은 하늘과 땅이 아울러 용납하지 못할 대역무도함이니 그것이 또한 네 열 번째 죄이다.

나는 의로운 군대를 거느리고 제후들과 함께 그 모진 역적 놈(잔적·殘賊)을 잡으러 왔다. 아직 지은 죄가 남아 군사로 싸우는 자들을 시켜(형여죄인·刑餘罪人) 그대를 잡게 하면 될 것을 무엇 때문에 수고롭게 창칼을 잡고 너와 싸울 것이냐?”

한왕이 그렇게 말을 마쳐 패왕의 속을 있는 대로 뒤집어 놓았다. 거기다가 군사들 중에 가장 낮고 천한 것이 죄 짓고 끌려와 갇히거나 죽는 대신 싸우는 무리였다. 패왕이 더는 참지 못하고 숨어 있는 궁수들에게 소리쳤다.

“궁수들은 무얼 하느냐? 저 자발없는 놈의 염통을 찢어 놓아라!”

그러자 진작부터 한왕을 겨누고 조금이라도 가깝게 다가오기를 기다리던 궁수들이 한꺼번에 강한 쇠뇌를 쏘아붙였다. 500걸음을 날아간다는 강한 쇠뇌의 살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공기를 가르고 날아갔다.

한왕이 워낙 조심스러워 동(東)광무에서 100걸음 안쪽으로는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화살 한 대가 정통으로 가슴에 와 박혔다. 큰 몽둥이로 가슴을 한 대 세게 맞은 듯 숨이 콱 막히며 정신이 아뜩해졌다.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려다가 갑자기 손을 내려 발목을 잡아 쥐었다. 그리고 짜낼 수 있는 힘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짜내 발을 들어 보이며 소리쳤다.

“저 종놈이 내 발가락을 맞추었구나(노중오지·虜中吾指)!”

그리고는 까마득히 정신을 잃어갔다. 그게 한왕 유방이었다. 그로 하여금 고조(高祖)로서 한(漢) 제국 400년을 열 수 있게 한 왕자(王者)의 자질이었다.

(모두 보고 있다. 내가 가슴을 맞고 목숨이 위태로운 걸 알면 적은 두 배나 사나워지고 우리 군사는 그대로 무너져버린다. 결코 들켜서는 안 된다….)

한왕 유방은 정신을 잃어가면서도 속으로는 그렇게 자신을 다잡고 있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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