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노년이 행복하다]<2>노동으로 가꾸는 황혼

  • 입력 2005년 1월 11일 18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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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모닝, 앤.”

미국 버지니아 주 페어팩스 카운티의 주택자재유통할인점인 ‘홈디포’에서 가전제품 판매를 담당하는 이재훈 씨(60)는 오전 7시 반이면 어김없이 매장 청소를 하며 반갑게 동료들을 맞는다.

그는 몇 해 전까지 미국 서부지역에서 연간 100만 달러(약 10억5000만 원)의 매출을 올리던 개인 유통업체를 운영해 교포사회에서 성공적 사업가로 알려진 인물.

하지만 부인의 병간호를 위해 2001년 사업을 접고 자녀들이 살고 있는 동부지역으로 이사했다. 가족들은 “그 나이에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라며 말렸지만 한평생 직장생활을 한 이 씨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나섰다.

미국의 주택자재유통할인점 ‘홈디포’에서 가전제품 판매원으로 일하는 이재훈 씨는 “일할 때 더욱 건강하다”고 말한다. 페어팩스(버지니아 주)=김재영 기자

이 씨는 “뭐든지 규칙적으로 집중하지 않고는 건강하게 못 살 것 같았다”며 “하루 8시간을 꼬박 서 있어야 하는 근무환경도 오히려 정신건강에는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말 일본 도쿄(東京) 내리마(練馬) 구청 사무실. 노인 10여 명이 두꺼운 돋보기안경을 쓰고 책상 위에 쌓인 수백 장의 의료보험카드와 관련 영수증을 일일이 대조하며 오류를 찾아내고 있었다.

5년째 이곳에서 일하는 히라이 요시오 씨(68)는 “반드시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은퇴한 뒤에도 일을 통해 나 자신이 여전히 의미 있고 사회적으로 쓸모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한다”고 말했다.

일하면서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자 하는 열망은 세계적 추세다. 이들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은 일하는 것이 노년의 삶에 자신감과 활력을 준다는 것. 일을 하는 목적도 다양하다.

일본 도쿄의 내리마 구청에서 노인 10여 명이 의료보험카드를 정리하고 있다. 이들은 다니던 직장에서 정년퇴직한 이후에도 자기만족과 건강을 위해 주 20시간 이내의 근무를 하고 있다. 도쿄=정세진 기자

은퇴 후 3년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렘브란트하우스 박물관에서 그림의 역사 등을 설명하는 일을 하는 젠 티센스 씨(68)는 “지금까지 해왔던 일과 전혀 다르지만 사람들을 만나는 새로운 경험이 매우 즐겁다”고 말했다.

사회에 아직도 자신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느낄 때 가장 행복하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사회적 잉여’인 노인들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일을 찾을 때 다시 젊음을 느낀다”고 말한다.

네덜란드 고령자 취업알선업체 ‘65+’의 미첼 반 단지흐 씨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른 은퇴를 꿈꾸지만 막상 은퇴하고 나면 몹시 일을 그리워한다”며 “일하는 노인들이 집에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행복하고 건강해 보인다”고 말했다.

영국의 가정생활용품 유통업체인 비앤드큐(B&Q)에서 일하는 렉 할아버지(91)와 코니 할머니(83)가 화분을 운반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이들은 은퇴 후 이곳에서 몇 년째 즐겁게 일하고 있다. 런던=전지원 기자

‘일하는 노년’과 행복의 관계는 학술적으로도 입증됐다. 특히 노년에 이르도록 경제활동을 한 경우 장수로 연결된다는 연구 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다.

미국의 저명한 장수학자인 토머스 펄스 하버드대 의대 교수는 2002년 ‘100세 장수법’이라는 저서에서 “미국의 100세 이상 노인 16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들은 평균 78세까지 생업에 종사했다”고 밝혔다.

거꾸로 비활동적인 노년을 보내는 경우 양상은 달라진다.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 이정재(李政宰) 교수는 “사회복지가 잘 돼 있는 독일의 경우 2002년 65세 이상 노인의 자살자가 3500명에 육박했다”며 “주로 양로원에서 생활해 온 사람들로 무가치한 인생이라는 허무감이 큰 요인이었다”고 말했다.

▼노년학연구 濠 앤드루스 교수 인터뷰▼

“이제 노년의 개념이 ‘삶을 즐길 수 있는 시간’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국제노년학계의 거목인 호주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대 노년학과 게리 앤드루스 교수(사진)는 “지금은 의학적 건강뿐 아니라 사회경제적으로 활동적인 노인이 필요한 시대”라며 이같이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노동인구가 줄어드는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퇴직에 대한 개념을 바꿔야 한다. 일을 더 오래 하도록 하는 것이 해법이다. 평균수명이 늘어나 이제는 인생의 3분의 1이 넘는 기간을 노인으로 보내야 한다. 노년이란 이제 삶을 즐길 수 있는 좋은 경험의 시간이다.”

―노인이 일할 수 있도록 어떻게 권장해야 하나.

“인식 전환의 문제다. 노인이 일하는 것은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 고용주도 노력해야 한다. 롤스로이스 사는 은퇴자들을 재고용해 파트타임으로 일을 시켜 성공한 바 있다.”

―한국에서는 나이가 든 뒤에도 일을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끼는 사람이 많은데….

“지속적인 교육과 캠페인으로 개념을 바꿀 수 있다. 우선 연령차별을 극복해야 한다. 인종차별, 성차별과 비슷한 문제다. 많은 사람이 늙는다는 것 자체를 두려워한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생산 능력이 있다.”

특별취재팀<사회부>

전지원 기자 podragon@donga.com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김재영 기자 jaykim@donga.com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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