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2030]<1>그들의 현주소…취업 힘들고 빚은 늘고

  • 입력 2003년 9월 14일 18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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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창원시 두산중공업 독신직원 기숙사는 몇 년 째 절반 가까이 비어 있다. 1200개의 방 가운데 500개는 주인이 없다.

이 회사 직원은 관리직과 생산직을 합쳐 모두 5900명. 이 가운데 20대는 260명에 불과하고 40대 이상이 3210명으로 전체의 54.4%를 차지하고 있다.

회사는 외환위기 이후 고졸 기능직 공채를 중단했고 1999년부터는 대졸사원 공채도 하지 않고 있다. 기존 인력에 대해 고용보장을 해주다 보니 20대 청년층 신입사원을 뽑지 못했다고 회사측은 설명했다.

미래의 성장엔진인 청년층이 실업과 신용불량, 가치관 상실로 흔들리고 있다. 6월 서울 강남구 코엑스몰에서 열린 채용박람회에서 구직자들이 구인 게시판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한 중견기업 재무팀에서 근무 중인 홍모씨(34)는 이민을 준비하고 있다.

대학병원 간호사였던 부인은 2년 전 구조조정으로 해고됐다. 스트레스로 탈모증까지 걸린 부인은 한 달에 60만원이나 되는 딸의 유치원비에 질려 남편에게 이민을 제안했다.

홍씨는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갖고 거의 매일 밤늦게까지 일해도 딸 유치원비를 걱정해야 하는 한국의 현실에 좌절감을 느낀다”고 털어놓았다.

▽일자리가 없고 미래가 불안하다=창원의 한 기업에서 30년간 근무해온 김모씨(49)는 현재 큰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도 직장을 못 구해 자포자기에 빠진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워하고 있다. 김씨는 “많은 국내기업의 노조가 강성인 데다 노사협상을 고용안정에 맞추다 보니 결국 아들이 피해를 보는 것 같다”며 “기업도 새로운 피가 수시로 수혈돼야 원활하게 돌아갈 텐데 걱정”이라고 말했다.

99년 서울 모 대학 컴퓨터학부를 졸업한 이모씨(29)는 조그만 벤처회사에 다니다가 한 달 만에 그만뒀다. 이씨는 현재 부모님과 함께 살며 생활비 등을 타 쓰는 한국의 ‘프리터족(族)’이 됐다. 이씨는 구직을 포기했기 때문에 실업자 통계에도 안 잡힌다. 그는 “30대에 어떻게 살아갈지를 생각하면 걱정되는 것이 사실”이라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빚이 늘어나면서 극단적 행동으로 치닫기도=서울에 사는 최모씨(24·여)는 중소기업 경리과에 다니다가 몇 달 전 신용불량으로 실업자가 됐다. 카드빚을 갚기 위해 돌려막기를 하다가 어느 틈에 쌓인 빚이 5500만원. 지금 새 일자리를 찾지만 받아줄 회사는 거의 없다. 최씨처럼 구직(求職) 기간 중 금융기관의 신용불량 리스트에 오른 구직자가 전체의 23.5%에 이른다.

‘2030의 좌절’은 자살 등 극단적 행태로 치닫기도 한다.

지난달 18일 서울 한강대교에서 택시를 타고 가던 조모씨(25·대학생)가 갑자기 차에서 내려 다리 아래로 투신자살했다. 조씨는 카드빚에 시달려 온 것으로 알려졌다. 또 이달 11일에는 경기 군포시에서 개인파산을 선고받은 이모씨(38)가 부인 및 두 아들과 함께 승용차를 타고 저수지에 투신해 이씨 부부가 숨졌다.

한국과학기술인연합회는 지난해 3월 해외유학 중인 이공계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유학 후 귀국 의향을 묻는 질문에 ‘현지에 정착하겠다’는 응답이 31%나 됐다. 능력 있는 젊은 인재의 ‘해외 탈출’이 그냥 넘겨버릴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섰음을 보여준다.

▽개인과 사회가 함께 노력해야=한국의 20대와 30대 인구는 2000년 현재 1530만9156명으로 전체의 34.24%에 이른다. 20대가 710만2192명으로 15.89%, 30대가 820만6964명으로 18.35%를 각각 차지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좌절하는 원인은 복합적이다. 전문가들은 개인적 구조적 문제가 함께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서울대사회발전연구소가 올 4월에 내놓은 ‘2003년 한국사회 국민의식과 가치관 조사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힘들게 저축하기보다 사고 싶은 것은 산다’고 응답한 20대 청년이 19.3%에 달했다. 반면 40대와 50대는 7.6%와 8.8%였다. 풍요로운 시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젊은층이 세상을 너무 쉽게 살려고 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을 꺾게 하고 경쟁력이 낮은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전반의 문제점도 간과할 수 없다. 청년실업만 해도 정부정책의 실패, 강성노조, 집단이기주의 등 한국적 특수성이 가세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한양대 경영학과 예종석(芮鍾碩) 교수는 “청년층은 사회적 책임을 깨달아야 하고 기성세대들은 통일된 경제회복 의지를 갖고 재도약을 해야 한다”며 “젊은층의 좌절을 막기 위해서라도 사회 전체적으로 ‘파이를 나눠 먹는 문제’보다 ‘성장에 대한 의지’를 우선 다져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특별취재팀

▼프리터族…오타쿠族…日도 골치▼

한국의 청년들이 겪고 있는 실업과 미래 비전의 상실 등은 대부분의 선진국 사회도 이미 겪었거나 지금도 골치를 썩이고 있는 주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집계한 2001년 말 선진국의 청년실업률은 △미국 10.6% △일본 9.7% △프랑스 18.7% △독일 8.4% △영국 10.5% 등 상당히 높다.

사회학자들은 선진국에서 고도성장기의 말미에 등장하는 청년층 위기의 역사적 단초를 미국의 ‘히피세대’나 프랑스의 ‘68세대’에서 찾는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골든 에이지’라 불리던 1950년대와 60년대 고(高)성장기에 풍요롭게 성장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청년이 된 이들 세대는 60년대 후반∼70년대에 걸친 저성장과 그에 따른 실업을 경험하며 기성사회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다.

80년대 미국에서는 철강 자동차 등의 제조업이 쇠퇴하면서 생산직 일자리는 크게 주는 대신 보수가 낮은 ‘서비스 직종’이 늘어나는 노동시장의 변화가 나타났다. 이 영향으로 80년대 후반에는 기성세대와 전혀 다른 가치관과 직업의식을 가진 ‘Ⅹ세대’가 출현했다.

90년대에 청년실업률이 전체 실업률보다 훨씬 빠르게 증가한 일본의 모습은 현재의 한국과 많이 닮았다. 일본 정부 조사에 따르면 일본의 모든 사업장 가운데 대졸 신입사원 채용계획이 있는 사업장이 90년 60%에서 2002년에는 28% 수준으로 줄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식 일자리를 얻지 못한 청년층은 파트타임 업무로 몰렸다. 영어인 자유(free)와 독일어인 아르바이터(arbeiter)를 합성한 ‘프리터족(族)’이라는 용어도 이때 생겼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불안한 상황에서 만화 자동차 등 자기만의 관심사에 빠져들면서 일반사회와 유리된 ‘오타쿠족(族)’이나 방안에 틀어박혀 PC에 매달려 생활하는 ‘은둔족’이 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60년 4·19혁명이 터진 이유를 대학졸업자의 높은 실업률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학자들이 있다. 또 외환위기 이후에는 취업난으로 사회 진출을 늦추기 위해 해외연수를 떠나거나 휴학하는 젊은이들 때문에 ‘모라토리엄증후군’ ‘캥거루족(族)’이라는 용어도 등장했다.

하지만 미국과 일본은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넘는 선진국으로 ‘현재의 수준’을 유지해도 되지만 한국은 1만달러의 중진국으로 ‘미래’를 위해 뛰어야 하는 차이가 있다.

연세대 사회학과 김호기(金皓起) 교수는 “지금 한국에서 청년실업이 문제되고 있는 세대는 6·25전쟁 이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인 ‘포스트 베이비붐 세대’”라며 “이들 세대는 인구층이 두껍고 풍요롭게 성장한 만큼 소비심리도 강해 장기적 실업자로 남으면 한국사회에 많은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풍요속에서 성장…새로운 환경 적응 못해▼

지금의 20대와 30대 초반 세대는 한국 사회에서 소위 ‘청년 위기’를 경험하는 첫 세대다.

고도 성장기를 살아온 이전 세대들은 지금처럼 실업과 신용불량, 미래의 비전 상실 같은 문제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금 젊은이들은 아무도 가르쳐 주지도, 가르쳐 줄 수도 없는 문제를 스스로 풀어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게다가 이들은 부모들의 노력으로 어느 세대도 누려보지 못한 풍요로움 속에서 자라난 세대다.

아직까지 한국의 젊은이들은 새로운 도전에 대처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기업이 사람을 뽑는 방식은 급격히 바뀌는데도 대입 준비하듯 영어나 컴퓨터 공부만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들은 사회가 정당하지 않다고 느끼게 된다. ‘이렇게 능력이 있는데 왜 나를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차 있다. 이렇다 보니 사회에 대한 불만과 스스로에 대한 연민은 더욱 과장될 수밖에 없다.

특이한 것은 청년들이 오히려 출세나 돈 같은 ‘하나의 기준’에 더 쉽게 끌려간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청년들의 가치관은 50, 60대보다 훨씬 보수적으로 변하고 있고 새로운 상황에 대한 적응력은 더 떨어진다.

외환위기 이전까지 한국의 인재육성 시스템은 기업이 사람을 데려다 자체적으로 키우는 방식이었다. 이런 구조 속에서 직장을 구하지 못한 젊은이는 사회적 낙오자가 되어 버린다. 졸업 후 3년 안에 ‘정규직’이 되지 못하면 나중에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기 힘들었고 ‘계약직’을 기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회는 바뀌고 있다.

계약직으로 시작하면 영원히 같은 상태에 머물 것이라는 청년층의 ‘비(非)탄력적인 사고’도 문제다. 마음에 차지 않는 직장이나 불안정한 계약직에서 출발해도 그 경험을 자신의 경력으로 다져가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사회는 실업 상태의 젊은이를 ‘준비인력’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또 인턴십 등을 확대해 대학 재학 중 기업을 이해하고 경력을 쌓을 기회를 줘야 한다.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

▼특별취재팀▼

▽팀장=권순활 경제부 차장

▽팀원=임규진 차장급기자

박중현 최호원 이정은 박용 김광현

송진흡 신석호 고기정기자(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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