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구름 일더니 卷二. 바람아 불어라

  • 입력 2003년 3월 20일 18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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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황제 2년 일월 패공(沛公) 유방은 방여(方與)란 곳에 군사를 머물게 하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천하의 풍운에 몸을 던진 뒤 석 달 남짓, 참으로 숨가쁘게 내달아온 나날이었다.

지난해 9월 현령의 자리를 맡아 먼저 패현(沛縣)을 수습한 유방은 다시 건달 시절 왕래가 잦았던 풍읍(豊邑)까지 아울러서 근거로 삼았다. 패공은 그를 우러러 모여든 젊은이 3천을 받아들여 군사로 조련하고, 소하 노관 조참 번쾌 주발 관영 하후영 같이 전부터 그를 따르던 이들에게는 각기 알맞은 벼슬을 내려 그들을 이끌게 했다. 그리하여 그들이 부릴 만한 장졸로 짜여지자, 아직도 천하의 큰 흐름을 알아보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는 이웃 고을들을 휩쓸기 시작했다.

첫 번째 목표는 풍읍에서 멀지 않은 호릉(胡陵)이었다. 새로 일으킨 군사의 날카로운 기세에다 갑자기 장수가 된 시골 아전[향리]과 장사꾼에 저잣거리 건달의 분발이 더해지니 그러잖아도 별로 싸울 마음이 없던 호릉 현령과 잔뜩 움츠러든 진군(秦軍)이 당해낼 리 없었다. 싸움다운 싸움도 없이 성은 떨어지고 호릉은 패공의 깃발 아래 들어왔다.

패공은 다시 길을 서북으로 잡아 방여(方與)로 군사를 몰고 갔다. 방여 또한 호릉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천하 대세를 탈 배짱도 없고, 진나라를 위해 성을 지키다 죽을 충성심도 갖지 못한 현령은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성문을 열었다.

열흘도 안돼 호릉과 방여 두 현(縣)을 더 차지한 패공은 방여에서 며칠을 쉰 뒤 다시 풍읍으로 돌아갔다. 아직 넉넉하지 못한 세력으로 전선을 너무 멀리까지 확대했다가 근거를 잃게 되면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풍읍과 패현을 중심으로 보다 힘을 기른 뒤에 다시 나아가기로 하고, 우선은 군사를 물려 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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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먼길에서 돌아온 장졸이 제대로 쉬기도 전에 놀라운 전갈이 들어왔다. 사천군(泗川郡·사수군)에 어사감(御使監)으로 내려와 있던 평(平)이란 자가 진군(秦軍)을 이끌고 호릉을 빼앗은 뒤 풍읍으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패공은 급히 장졸들을 불러모아 싸울 채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미처 채비가 갖춰지기도 전에 어사감 평의 군사들은 풍읍을 에워싸고 말았다.

그때 평이 이끈 진나라 군사들은 진승이 보낸 주문(周文)의 군대가 희수(戱水) 가에서 저희 편 장수 장함에게 크게 지고 쫓겨났다는 것을 이미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움츠러들었던 기세가 되살아난 데다 그 머릿수 또한 적지 않았다. 하지만 패공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장졸들을 하루 더 성안에서 쉬게 한 뒤 한꺼번에 휘몰아 성을 나갔다.

겁을 먹은 패공이 성을 의지해 버틸 줄 알았던 진군은 그 갑작스러운 공격을 당해내지 못했다. 어사감 평이 이끈 진군은 한 싸움에 뭉그러져 호릉으로 달아났다. 이에 패공은 풍읍을 옹치(雍齒)에게 지키게 한 뒤 남은 장졸을 이끌고 평을 뒤쫓았다.

패공이 옹치에게 풍읍을 맡긴 데는 까닭이 있었다. 옹치는 그곳에서 나고 자랐을 뿐만 아니라, 얼마 전까지도 그 뒷골목을 휘어잡고 있던 건달들의 우두머리였다. 비록 패공 밑으로 들어온 것은 아직 두 달이 못되지만, 적어도 풍읍을 맡아 지키는 일이라면 그보다 나은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거기다가 끝까지 맞서다가 대세가 기울자 마지못해 머리를 숙이고 들어온 터라, 패공에게는 은연중에 그런 옹치의 진정을 한번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 옹치도 패공을 따라 어사감 평을 뒤쫓기보다는 풍읍에 남아서 지키는 쪽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군사 약간과 전부터 그를 따르던 졸개 몇만 남겨주었는데도 별로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저 옹치란 자를 믿어도 되겠습니까? 번쾌와 노관이라도 곁에 붙여두는 게 어떨는지요?”

매사를 꼼꼼히 살펴 처리하는 소하가 걱정스런 눈길로 패공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오래 옥리(獄吏)로 일해 패현 뿐만 아니라 풍읍의 건달패까지도 잘 아는 조참 또한 옹치를 좋게 보지 않았다.

“듣기로 옹치는 고집이 세고 자존망대(自尊妄大)하여 남의 밑에 들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라 했습니다. 거기다가 수하(手下)들을 사납게 다루어 한번 그 밑에 들면 벗어날 길이 없다 하니 그 비뚤어진 심사를 알만 합니다. 믿고 풍읍을 맡길 자가 못됩니다”

그러나 패공 유방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의심하기로 한다면 누군들 믿을 수 있겠소? 또 이미 의심하면서 우리편을 남겨둔다는 것은 성을 나서는 우리 힘을 줄이는 일이 될 뿐만 아니라, 일이 그릇되었을 때는 그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니 더욱 그리해서는 아니 되오.”

그러면서 풍읍을 오직 옹치에게만 맡긴 체 자신을 따르는 장졸들은 모조리 이끌고 성을 나섰다.

패공에게 한번 혼이 난 어사감 평은 호릉 성안에 굳게 틀어박혀 지키기만 했다. 그때 다시 패공을 따라나선 시골 아전이나 건달 출신 부장(部將)들의 눈부신 분발이 있었다.

번쾌는 패공 유방의 사인(舍人·왕공이나 귀족을 곁에서 수행하는 관원)이었는데 지난번 호릉과 방여를 칠 때 이미 그 용맹을 한껏 펼쳐 보인 바 있었다. 이번에도 큰칼을 잡고 패공을 호위하다가 군사들을 휘몰아 앞장 서 호릉성을 들이쳤다. 현청의 마부[御者]였던 하후영은 이때 이미 칠대부(七大夫)로 태복(太僕)이 되어 패공의 마차를 몰았다. 그러나 호릉 성에 이르자 마차를 버려 두고 번쾌와 마찬가지로 앞장서 성벽을 기어올랐다.

조참은 중연(中涓·원래는 황제의 시종관. 副官격)으로 군사를 휘몰아 싸웠는데, 그 옛날의시골 옥리 같지 않았다. 그 기세가 얼마나 사나운지 진나라 군사들이 감히 그 앞을 막지 못했다. 주발(周勃) 역시 중연으로 싸웠는데 강한 활을 당겨 화살을 날리는 족족 적군을 꿰어놓았다. 누구도 그가 누에치기로 살면서 상가(喪家)에서 피리를 불어주던 그 주발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병졸로 따라나선 패현 젊은이들까지 무엇에 홀린 듯 분기해 싸우니 어사감 평이 아무리 높고 두터운 성벽에 의지하고 있다 해도 호릉을 지켜 낼 수 없었다. 겨우 한나절을 버티다가 마침내 성문을 열고 항복해버렸다.

호릉을 되찾고 한숨을 돌리려는데 다시 급한 전갈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사천(사수) 군수 장(壯)이란 자가 대군을 이끌고 설현(薛縣) 쪽에서 밀고 든다는 내용이었다. 패공은 장졸들을 제대로 쉬게 하지도 못하고 군사를 설현으로 휘몰았다.

싸움에 이긴 뒤라 그런지 장수도 군사도 피로한 줄 몰랐다. 하룻길을 달려 설현에 이르자 다시 한바탕 격전이 벌어졌다. 호릉 싸움에서 공을 세워 칠대부에서 오대부(五大夫)로 오른 하후영과 중연에서 칠대부가 된 주발이 앞장서 내닫고, 번쾌가 나머지 군사들을 휘몰아 그 뒤를 받쳐주었다.

몸은 고단하지만 정신은 한 것 고양돼있는 장졸들이 한 덩이가 되어 짓두들겨 대니 이미 무너져 내리는 제국의 기 꺾인 군사들이 무슨 수로 맞서낼 수 있겠는가. 거기서 진(秦)의 사수군(泗水郡)을 지키던 마지막 병력이 무너지고, 그 군수 장은 척현(戚縣)으로 달아났다. 그러자 패공의 좌사마(左司馬)로 있던 조무상(曹無傷)이 나섰다.

“대군이 번거롭게 움직일 것 없습니다. 제가 한 갈래 군사를 이끌고 뒤쫓아가 사천(사수) 군수의 목을 얻어 오겠습니다.”

그 동안 별로 눈에 띄게 세운 공이 없어 너무 서두는 듯한 느낌이 있었지만 그 기상만은 한번 기대를 걸어볼 만했다. 패공이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허락하고 나머지 장졸은 설현에서 쉬게 했다. 오래잖아 조무상이 돌아와 정말로 사천 군수 장의 목을 바쳤다.

거듭 이겨 힘이 난 패공은 군사들이 기력을 회복하기 바쁘게 북쪽 멀리 항보(亢父)로 밀고 들었다. 현위(縣尉)가 성안의 진병(秦兵)을 모조리 긁어 사천 군수를 도우러 간 바람에 텅 비다시피 한 항보에는 따로 지켜주는 세력이 없었다. 마치 안겨오듯 패공에게 귀순해왔다.

하지만 항보에서도 오래 쉴 수는 없었다. 그때 이미 서쪽의 정세는 크게 글러져 진왕(陳王) 진승은 죽은 뒤였다. 그러나 정확한 소식 대신 종잡을 수 없는 소문만 어지럽게 나돌아 사람들을 갈팡질팡하게 만들었다. 그 중에도 진승이 이미 죽었을 뿐만 아니라, 진나라가 끝내는 반란을 진압하고 질서를 회복할 것이라 믿는 세력 일부가 방여(方與)를 되찾아갔다는 파발이 들어왔다.

이에 패공은 급히 항보를 떠나 급히 방여로 군사를 몰아갔다. 항보를 떠날 때만 해도 또 한 바탕 힘든 싸움을 예측하였으나 다행히도 방여를 차지했던 세력은 파발이 알려온 것처럼 그리 대단치가 못했다. 패공이 주발에게 딸려보낸 한 갈래 군사조차 당해내지 못해 성을 내주고 달아나 버렸다.

이번에도 힘든 싸움 없이 방여를 되찾은 패공은 그곳에서 며칠 쉬며 마지막 기승을 부리는 추위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며칠 편히 쉬기도 전에 풍읍에서 기막힌 소식이 왔다. 옹치 밑에 남아있어도 속으로는 유방을 따르던 젊은이 하나가 진눈깨비 속을 달려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옹치가 주불(周불)에게 항복하고 풍읍을 위나라에 바쳤습니다!”

주불은 원래 진왕(陳王)의 장수였다. 진왕의 세력이 한창일 때 그 명을 받들어 옛 제(齊)나라 땅을 거두어들이고자 군사를 이끌고 그리로 갔다. 하지만 그때는 옛 제나라 왕족인 전담(田담)이 적현(狄縣)에서 군사를 일으켜 현령을 죽이고 제나라를 다시 세운 뒤였다. 주불이 들어가자 대군을 보내 맞섰다.

주불은 진왕의 위세를 앞세우고 싸웠으나 끝내 전담의 군사를 당해내지 못했다. 한 싸움에 크게 져 군사를 태반이나 꺾인 체 옛 위(魏)나라 땅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이에 주불은 마지막 위왕(魏王)의 적통이 되는 영릉군(寧陵君) 구(咎=魏咎)를 왕으로 세워 위나라 사람들의 힘을 빌고자 했다. 그런데 영릉군 구는 그 무렵 진왕의 부장(部將)으로 진(陳) 땅에 남아 있어 위왕으로 세울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럭저럭 하는 사이에 주불이 위나라 옛 땅을 거의 다 평정하자 위나라 사람들을 그를 왕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주불은 끝내 사양하고 사자를 진왕에게 보내 영릉군을 보내 주기를 청하였다. 사자가 위(魏)와 진(陳)을 오가기 다섯 차례, 마침내 진왕은 영릉군 구를 위왕으로 세우는 것을 허락하고 그를 위나라로 돌려보냈다.

위왕이 된 영릉군 구는 주불의 공을 잊지 않고 그를 재상으로 삼았다 - 거기까지는 패공 유방도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그 주불이 풍읍으로 쳐들어온 것이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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