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포커스]업종의 벽 넘나드는 경영자들

  • 입력 2002년 10월 30일 18시 26분


클래식과 팝을 넘나드는 ‘크로스오버(cross-over)’는 요즘 음악계의 새로운 현상이다.

현미경처럼 한 분야를 파고 들어가는 전문화로 치닫는 최근의 큰 흐름과는 언뜻 어긋나 보인다. 그렇지만 이질적인 영역간의 교류로 음악의 폭과 지평을 넓히고 있다.

이 크로스오버가 음악뿐만 아니라 기업 경영자 시장의 세계에도 확산되고 있다. ‘전공’과는 무관한 다른 업종으로 진출해 뛰어난 경영실적을 올리는 경영자들, 이를테면 ‘최고경영자(CEO)들의 크로스오버’인 셈이다.

이들은 그라운드는 달라도 경영의 기본은 같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CEO에게서 전문가보다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역할을 찾는 추세와도 맞아떨어진다.

▽CEO들의 크로스오버〓1990년대 중반 어려움에 빠졌던 미국의 IBM은 새 회장으로 전혀 의외의 인물을 불러들였다.

새 ‘구원투수’로 영입된 루 거스너는 그때까지 전자업종과는 별 관련이 없는 카드와 식품업체에서 경력을 쌓아온 사람이었다. 자존심 강한 IBM 직원들은 처음에 새 회장의 이런 이력서를 보며 “과자 회사(나비스코) 사장이 어떻게 IBM을 맡을 수 있나”면서 강한 거부감을 가졌다.

그러나 거스너는 낯선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함으로써 전천후 경영자임을 보여줬다. 미국 기업세계에서 ‘거스너 케이스’는 이제 예외가 아닌 한 전형이 되고 있다.

미국보다는 아직 경영자의 전공 부문간 칸막이가 높은 한국. 그러나 90년대 후반 이후 그 칸막이가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

대표적인 이가 김정태 통합 국민은행장이다. 20여년간 증권맨으로 일해왔던 그는 98년 은행장(주택은행)으로 깜짝 변신했다. 특히 외부 인사의 영입에 폐쇄적인 은행권의 속성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스카우트였고, “아무리 뛰어난 증권맨이었더라도 증권과 은행은 다른데…”라는 회의 어린 시선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김 행장은 입행(入行) 4년이 지난 현재 성공적인 변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성공사례를 참조한 듯 ‘제2의 김정태’들이 잇따라 나타나고 있다.

지난달 동부한농화학 CEO로 전격 영입된 신영균 사장도 화학 부문엔 아마추어. 대우중공업과 대우조선을 이끌면서 조선업계의 대표적 경영자로 통했던 인물이다. 중후장대한 조선 업종에 비해 화학은 다품목 소량 제품을 다룬다는 점에서 대조되는 영역.

그러나 동부그룹측은 그의 영입에 대해 “화학 분야 전문가보다는 기획과 재무통인 신 사장이 다양한 업종이 묶여 있는 화학 회사 경영자로 오히려 적합하다”며 기대를 걸고 있다.

부도난 해태제과의 정상화를 위해 스카우트된 차석용 사장도 원래 과자가 아닌 생리대와 화장지에 대해 잘 알던 경영자였다.

P&G페드코리아 사장을 지낸 그는 1년 만에 “회사를 기대 이상 수준으로 회복시켜 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업종은 달라도 기본은 하나〓국내 대기업들 일부에서도 몇몇 크로스오버 사례를 볼 수 있다.

삼성그룹의 경우 홍종만 삼성코닝정밀유리 사장은 보험과 자동차 유리 등 다양한 업종을 거친 경영자다. 홈쇼핑 업체인 CJ39쇼핑 조영철 사장도 보험회사 출신이다. 그러나 아직은 한국 기업보다는 외국계 기업에서 특히 눈에 많이 띈다.

야후코리아 이승일 사장은 BMS라는 미국계 제약 회사의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지역 사장을 맡았었다. 경력만 놓고 보면 인터넷 업체 최고경영자와는 맞지 않아 보인다.

나이키코리아 하윤도 사장도 나이키에 합류하기 전까지는 식품 체인점에서 잔뼈가 굵었다. 치킨 전문 프랜차이즈와 피자헛, 멕시코 요리 전문체인 등 ‘음식’이 전공이었던 그가 스포츠 용품으로 전과(轉科)를 한 셈이다.

이들은 그러나 “업종은 달라도 경영의 속성은 같다”는 점을 체험적으로 얘기한다.

김정태 행장은 “은행이든 기업이든 이익을 많이 내 주가가 높아지도록 하는 것이 경영의 핵심인 점은 똑같다”고 늘 말한다. 하윤도 사장도 “업종이 달라도 CEO가 사업의 본질만 꿰뚫고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의 말처럼 업종의 벽을 넘나드는 성공 사례가 잇따른다면 크로스오버는 CEO 시장의 새로운 트렌드로 뿌리내릴 전망이다.

이명재기자 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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