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할리우드 최대 흥행작은 '해리포터와 혼혈왕자'였다. 세계적으로 9억2935만 달러(약 1조805억원)의 수익을 올리며 '해리포터 마법'을 재연했지만 국내관객은 297만명에 불과했다. '해리포터' 시리즈 고정 팬들이 극장으로 몰렸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초라한 성적이다.
국내 영화들의 개봉 시기까지 결정하는 할리우드 '대박' 영화가 이처럼 기대 이하의 성적을 내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2009년 한 해만 봐도 할리우드 '대박'들은 국내에서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 '재미도 없고 엣지도 없고' 애니메이션 수난시대
8월 개봉한 '아이스 에이지3: 공룡 시대'는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미국을 제외한 나라들에서만 6억8710만 달러의 흥행 수입을 거둬들여 애니메이션 사상 최고 기록을 세웠을 정도. 하지만 한국에선 명함도 내밀지 못했다. 여름방학에 맞춰 개봉했음에도 불구하고 86만명이라는 초라한 성적을 거뒀을 뿐이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에 무비홀릭을 연재하고 있는 이승재 기자는 "'아이스 에이지3'의 실패는 이미 예견된 일"이라고 말한다. "미국에서는 성공한 시리즈의 2편, 3편이라고 하면 일단 무조건 보는 편이지만 한국 관객은 그 자체로 상품성이 있는 '엣지'가 있어야 본다"는 설명이다. 그는 "'아이스 에이지' 시리즈는 2편부터 꼭 챙겨보아야 할 연속적인 '엣지'가 없었기 때문에 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할리우드에선 \'대박\'을 낸 \'아이스 에이지3\'는 국내에선 \'쪽박\'을 찼다. 아이스 에이지3 중 한 장면.
세계적으로 6억8300만 달러의 수입을 거둔 픽사의 애니메이션 '업'도 국내에선 100만 관객을 가까스로 넘었다. 이승재 기자는 "부담스럽기만하고 재미없는 애니메이션"이었기 때문이라고 원인을 설명했다. 미국에선 애니메이션이 철학적인 영역에까지 이르는 것에 대해 관객들이 동의하지만 국내는 그렇지 않다는 것. 그는 "한국에선 여전히 '애니메이션은 재밌어야 한다'는 선택의 기준이 명확하게 남아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국내 관객들이 애니메이션 자체를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아이스 에이지3', '업' 등 애니메이션의 잇따른 흥행 실패에 대해선 "과거 '슈렉' 등 사랑받은 애니메이션들도 많다"며 "국내 관객들이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 '니들이 사랑을 알아?' 꽃미남 꽃미녀 나와도 무반응
"애플파이로 풍차 돌리기라도 하지 않는 한 미국 남녀 고딩들의 청춘 로맨스는 찬밥 신세다" '필름2.0'에 '영화 궁금증 클리닉'을 연재했던 김세윤 기자는 유독 한국에서 먹히지 않는 외화 장르 중 하나로 '청춘 로맨스물'을 꼽는다.
'청춘 로맨스물은 한국에서 안 먹힌다'는 영화계 법칙은 2009년 12월 초 개봉한 '뉴 문'이 증명했다. '뉴 문'은 뱀파이어와 인간과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2008년 개봉작 '트와일라잇'의 후속작.
꽃미남 꽃미녀를 수 십명 들이대도 미국산 '청춘 로맨스'는 국내 팬들을 유혹하지 못한다. '뉴 문' 포스터.
'뉴 문'은 뱀파이어 열풍을 일으킨 '트와일라잇'의 후속작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개봉 전부터 전 세계 여성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북미 지역에서는 개봉 첫 주 1억4070만 달러를 벌어들여 박스오피스 신기록을 세우며 기대에 부응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저 그런 성적을 내고 있다. '트와일라잇'이 120만 관객을 기록하며 조용히 막을 내리더니 꽃미남 꽃미녀 뱀파이어와 근육질 늑대인간들을 대거 투입한 '뉴 문'도 겨우 200만 관객을 넘보고 있는 상황.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유독 한국에서만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는 '뉴 문'이 뱀파이어물이 아닌 뱀파이어라는 독특한 소재를 채택한 '청춘 로맨스물'이라는 점을 기억하면 쉽게 설명된다. ▶ '어디서 웃어야 하지?' 백전백패 코미디물
토드 필립스 감독의 '더 행오버'는 북미 박스 오피스 2주 연속 1위를 차지, 2009 상반기 최고의 코미디 영화로 꼽힌다. 골든글러브 뮤지컬/코미디 부문 작품상에 후보로 오를 정도로 작품성도 인정받았다. 그러나 국내 관객들은 '더 행오버'를 극장에서 만날 수 없다. 그나마 최근 DVD가 출시된 것을 위안삼아야 할 판이다.
원인은 장르에서 찾을 수 있다. 코미디물은 청춘 로맨스물과 함께 '한국에선 먹히지 않는 외화'로 구분된다. 외국인과 한국인이 웃는 코드가 다르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코미디물은 해외에서 아무리 대박을 터뜨렸다 해도 국내에선 단관 개봉하거나 DVD로 직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공포물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미국 관객들은 '호러'를 일종의 '판타지'로 보지만 한국 관객들은 '리얼리즘'으로 받아들인다.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봐도 미국인들은 '끔찍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다양한 기술들'에 중점을 두고 보는 반면 한국 관객들에게는 그저 '너무 끔찍한 장면'일 수밖에 없는 것. 이런 이유로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 '쏘우' '호스텔' 등 공포물은 미국에선 큰 성공을 거뒀지만 국내에선 쪽박을 찼다.
최첨단으로 무장한 '트랜스포머' 시리즈는 미국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큰 호응을 얻었다. 트랜스포머2:패자의 역습 스틸컷.
▶ 'IT강국 코리아' 영화 소비도 '얼리 어답터'
반대로 '트랜스포머2: 패자의 역습'은 고향 미국에서보다 국내에서 더욱 사랑받았다.
"제작사인 파라마운트 측의 스케줄엔 한국이 빠져있었다. 그러나 '트랜스포머'의 흥행 성적이 좋아서 내가 자진해서 한국에 오고 싶다고 주장했다."
'트랜스포머' 감독 마이클 베이와 주연 배우 샤이아 라포프, 메간 폭스가 개봉을 앞두고 한국을 찾았다. 이들은 일정까지 조율해 스스로 한국에 오겠다고 자청했다. 한국 관객들의 유별난 '트랜스포머' 사랑을 알고 있기 때문. '트랜스포머2'는 미국과 일본에서는 박스오피스 1주 정상을 차지한데 그쳤으나 국내에서는 3주 연속 정상을 지키며 외화 사상 최초로 1000만 관객을 돌파할 것이냐에 관심이 집중됐었다.
감독조차 "왜 유독 한국에서 인기 있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고 답했지만 전문가들은 로봇의 등장을 성공 이유로 꼽는다. 최첨단 영상과 로봇으로 무장한 만큼 IT 강국인 한국의 '얼리 어답터' 관객들을 유혹하기 충분했다는 것. 또 '태권V'로 대표되는 로봇에 대한 추억이 있는 30~40대를 극장으로 끌어들였다는 점도 흥행에 도움이 됐다.
미국에서는 흥행 성적이 시원찮았던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이 국내에선 452만 관객을 동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밖에도 '스타트랙:더 비기닝' '엑스맨 탄생: 울버린' 등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작품에는 국내 관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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