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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국제

러, 하이브리드戰 올인…美대선-아바나증후군 개입 의혹[글로벌 포커스]

입력 2022-02-19 03:00업데이트 2022-02-19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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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위기로 다시 주목받는 ‘하이브리드 전쟁’
10만대군 우크라 국경 배치했지만, 지상군 교전 등 직접 충돌 대신
우크라 국영은행 등 해킹 공격… 가짜뉴스-음모론 유포 일삼아
푸틴 측근인 군총참모장이 주도… 국영언론 동원해 대대적 선전선동
“21세기는 하이브리드 전쟁의 시대다. 이 전쟁에 대응할 단일 정책은 없다.”

토드 헬머스 미국 싱크탱크 랜드코퍼레이션 연구원이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한 말이다. 복합 전쟁, 비(非)대칭 전쟁으로도 불리는 하이브리드 전쟁(Hybrid Warfare)은 무기 외에도 해킹, 가짜 뉴스, 경제 침투, 정치 공작 등을 결합한 현대전의 양상을 일컫는 용어다. 공격 주체와 공격 의도가 잘 드러나지 않으므로 신속한 방어가 어렵고 소셜미디어, 드론 등 정보기술(IT)의 중요성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다. 정규군과 비정규군, 군인과 민간인, 전시와 평상시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점도 특징이다.

‘하이브리드 전쟁의 최강국’으로 꼽히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위협 또한 선전포고, 국가 대 국가의 대립, 최신식 무기를 동반한 지상군 교전 등으로 표현되는 기존 전쟁의 문법을 바꿔놓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해 11월 우크라이나 국경지대에 10만 대군을 보낸 러시아는 현재까지 약 넉 달 동안 직접적인 교전을 하지 않은 채 우크라이나 정부 기관에 대한 잇따른 사이버 공격, 가짜 뉴스와 음모론 유포 등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도 실제 우크라이나 영토를 침공한 것 이상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 및 나토 동진(東進) 금지 같은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관철하려 하고 있다.
○ 러, 소련 붕괴 뒤 하이브리드戰 전력
러시아가 하이브리드 전쟁에 천착하게 된 계기로 소련 붕괴가 꼽힌다. 고질적 경제난에 직면한 러시아는 걸프전, 이라크전, 아프가니스탄전 등에서 속속 최신식 무기를 시험하는 미국에 맞설 수 없었다. 이런 비대칭적인 상황에서 러시아가 들고나온 전략이 바로 하이브리드 공격이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가짜 뉴스와 왜곡 정보를 퍼뜨리고 해킹을 통해 상대국 주요 정부기관, 발전소, 교량 등 핵심 인프라를 마비시키는 데에는 최신식 미사일과 전투기를 개발할 때만큼 천문학적 비용이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이로 인한 사회 혼란은 상당해 공격 효과가 크다. 책임 소재를 회피하기도 쉽다.

러시아의 하이브리드 공격을 총괄하는 사람으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신뢰가 두터운 것으로 알려진 발레리 게라시모프 군총참모장(67)이 꼽힌다. 그는 2013년 러시아 군사 매체에 소위 ‘게라시모프 독트린’으로 불리는 새로운 안보 전략을 담은 글을 기고해 큰 반향을 불렀다. 당시 그는 “전쟁은 더 이상 선전포고로 시작되지 않으며, 일단 시작되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방법과 완전히 다르게 진행된다”고 주장했다.

게라시모프는 현대전을 정치 경제 정보 등 비군사적 조치를 현지 주민의 항의와 결합시킨 비대칭적 군사 행동으로 정의했다. 여론 조작과 선전선동 등으로 아군과 적군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집단 간의 분열과 무력 충돌이 일어나면 멀쩡한 국가가 순식간에 무정부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게라시모프를 비롯한 러시아 수뇌부는 2000년대 중반부터 우크라이나 조지아 키르기스스탄 등 옛 소련 지역에서 일어난 ‘색깔 혁명(color revolution)’, 2011년 ‘아랍의 봄’ 같은 반정부 시위가 서구의 개입으로 이뤄졌다는 강한 의심을 갖고 있다. 특히 2013년 말부터 벌어진 ‘유로마이단’ 반정부 시위로 친러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축출된 것에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재래식 군사력으로는 대응하기 어려운 이런 위협에 대응하려면 러시아 또한 하이브리드 전쟁으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를 문제 삼는 러시아 또한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강제 병합, 이후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에서의 정부군과 친러 반군의 교전에 하이브리드 전쟁 형태로 깊숙이 개입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 국영 언론도 대거 동원
러시아투데이(RT), 타스통신, 스푸트니크통신 같은 국영 언론을 동원해 대대적인 선전선동에 나서는 것 또한 러시아 특유의 하이브리드 전술로 꼽힌다. 이들은 러시아를 찬양하고 서방을 비판하는 일방적인 기사를 거듭 내보내면서 여론에 강한 영향을 주고 있다.

그 한가운데에 2005년 설립된 국영방송 RT가 있다. 설립 직후만 해도 주로 러시아 문화를 소개했지만 2008년 러시아의 조지아 침공 후 본격적으로 푸틴 정권을 칭찬하고 서방을 비난하는 콘텐츠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2018년 3월 영국 솔즈베리에 거주하던 전 러시아 정보 요원 세르게이 스크리팔과 딸 율리야가 독성 물질 ‘노비초크’에 노출돼 생명의 위협을 받은 사건이 벌어졌다. 노비초크는 2020년 푸틴 대통령의 최대 정적인 알렉세이 나발니에 대한 암살 미수 때도 사용된 물질이다.

당시 영국 정보기관은 “러시아 정보 요원의 소행이며 이들의 배후에 푸틴 대통령이 있다”고 분명히 밝혔다. 하지만 RT는 “용의자로 지목받는 사람들은 모두 영국 관광을 갔을 뿐이며 암살과 무관하다”며 서방을 규탄했다. 이런 보도에 거듭 노출된 러시아인으로선 ‘서방은 언제나 러시아만 문제 삼는다’는 왜곡된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다.

서방 언론학계는 RT를 ‘허위 정보와 음모론의 공급자’라고 비판한다. 2일 독일 정부 또한 자국 내 RT 채널의 독일어 방송을 중단시켰다. 영국, 프랑스 미디어 규제당국 또한 수차례 “RT가 중요한 오해의 소지가 있는 콘텐츠를 거듭 방송하며 공정성 규정을 위반했다”고 지적했다.
○ 2016년 미 대선에도 러 개입 의혹

러시아가 직접적으로 관련됐거나 관련 의혹을 받는 하이브리드 공격의 사례는 상당하다. 뉴욕타임스(NYT) 등 서구 언론은 러시아가 체제 전복, 사보타주, 암살 등이 전문인 ‘29155’ 특수부대와 대외정보국(SVR) 내 해커 집단 ‘ATP-29’ 같은 하이브리드 전쟁에 특화된 조직, 민간 해커 고용 등을 통해 수많은 공격을 벌였다고 지적한다.

러시아는 2008년 조지아 침공 당시 지상군 파견과 별도로 조지아 대통령실, 국방부, 외교부, 의회, 주요 언론 등에 무차별 디도스 공격을 가했다. 2014년 초 우크라이나 크림반도의 강제 병합 때도 2000여 명의 러시아군이 소속 부대, 계급, 명찰 식별이 어려운 국적 불명의 군복을 착용한 후 크림반도에 투입됐다.

크림반도 병합으로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 정부군과 친러 반군이 교전을 시작한 후에는 러시아 군인들이 군복에서 부대 기장을 떼어내 민간인처럼 가장하고 친러 반군을 돕는 일이 벌어졌다. 러시아는 이와 별도로 돈바스 지역에 수천 명의 정보 요원을 보내 중앙정부를 공격하고 분리 독립 혹은 러시아와 합병을 해야 한다는 여론을 설파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4년 5월 우크라이나 대선 때도 친러 성향 해커들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 등에 사이버 공격을 가했다. 당시 ‘초콜릿 왕’으로 유명한 제과 재벌 페트로 포로셴코 후보가 월등히 앞서고 있는데도 러시아 채널1방송은 “극우 정당 후보가 이기고 있다”는 가짜 뉴스를 거듭 보도했다.

2016년 쿠바 아바나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처음 발견된 후 현재까지 약 750건이 보고된 ‘아바나 증후군’의 배후에도 러시아가 있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는다. 해외 파견된 미 외교관과 정보 요원이 두통, 환청, 어지럼증, 인지 장애 등에 시달리는 현상이다. 미 정보당국은 조사를 통해 극초단파 공격이 원인임을 밝혀냈지만 배후에 관한 직접적 증거를 찾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강한 부인에도 러시아가 배후라는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NYT에 따르면 지난해 말 러시아를 방문한 윌리엄 번스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아바나 증후군의 배후가 러시아로 드러나면 책임을 져야 한다”고 경고했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와 미 의회는 2016년 미 대선에도 러시아가 개입했다고 수차례 지적했다. 러시아가 친러 성향인 도널드 트럼프 당시 공화당 후보의 당선을 위해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가 피자가게 지하에서 아동 성매매 조직을 운영했다는 ‘피자게이트’ 같은 음모론을 확산시키는 데 관여했다는 것이다.

2016년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국민투표와 프랑스 대선, 독일 연방하원 총선거 등이 줄줄이 치러진 2017년 유럽 주요국의 정치 일정에도 러시아가 관여해 반EU 및 무슬림 혐오 여론을 조성하고 극우 후보를 지지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5월에는 미 최대 송유관 운영사인 콜로니얼 파이프라인이 러시아 해커 집단의 공격을 받아 뉴욕 등 미 17개 주가 비상사태를 선언하는 일도 벌어졌다.
○ 우크라 사태에서도 하이브리드 공격 기승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사태에서도 하이브리드 공격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 침공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가짜 정보를 퍼뜨리고 자작극을 연출하는 데 열심이다.

미 정보당국은 지난달 “러시아가 돈바스 지역에서 정부군이 러시아계를 공격하는 장면을 의도적으로 연출한 동영상을 퍼뜨려 침공 명분을 쌓으려고 했다”고 지적했다. 나토 무기처럼 보이는 듯한 무기로 정부군이 친러파를 공격하는 모습을 보여줘 러시아계의 공분을 유도하려 했다는 것이다.

지난달 14일에도 우크라이나 7개 정부 부처, 국가응급서비스 등 70여 개 주요 기관의 웹사이트가 해킹으로 몇 시간 동안 마비됐다. 이달 15일에도 우크라이나 최대 상업은행 프리바트와 대형 국영은행 오샤드, 국방부 웹사이트가 먹통이 됐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모두 러시아 소행이라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이 “돈바스에서 집단학살(genocide)이 일어나고 있다”는 과격한 주장을 펴는 것, 서방이 직접적인 철군 증거가 없다고 거듭 지적하는데도 “우크라이나 국경지대에서 철군했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전형적인 하이브리드 전술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현재 돈바스 지역의 소셜미디어에는 정부군이 화학무기까지 사용해 친러파에 대한 집단학살을 자행했고, 시신을 묻은 집단 매장지가 발견됐다는 가짜 정보까지 퍼지고 있다.

제성훈 한국외국어대 교수(노어과)는 “러시아가 유로마이단 시위 때부터 우크라이나 중앙정부를 본격적으로 악마화했다”고 진단했다. 시위대가 친러 야누코비치 정권을 반헌법적 방식으로 축출했고, 친서방파의 대부분은 과거 나치 독일의 부역자 후손이라는 식의 선전선동을 통해 친러와 반러로 우크라이나 국민을 완전히 분열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RT 같은 선전 매체를 통해 옛 소련 국가의 국민에게 자국 정보와 언론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만드는 것도 러시아 특유의 하이브리드 전술”이라고 진단했다. 지금보다 소련 시절이 훨씬 살기 좋았다는 식으로 친러파를 자극해 러시아와의 합병 여론을 고조시킨다는 것이다. 2014년 크림반도 합병 때도 총 한번 쏘지 않고 목적을 달성했던 러시아가 이번 사태에서도 친러 성향의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을 손아귀에 넣기 위해 유사한 전략을 펴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파리=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
김수현 기자 news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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