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성동기]두테르테에 레드카펫 깔아준 中의 속내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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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기 국제부 차장
성동기 국제부 차장
 “중국만이 우리를 도울 수 있다. 경제 협력을 확대하고 싶다.”

 18일부터 중국을 국빈 방문 중인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출국에 앞서 중국 관영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필리핀 인권 문제를 제기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향해 “지옥에나 가라”고 핏대를 세웠던 그가 중국을 향해서는 몸을 낮춘 것이다. 두테르테는 “다른 나라가 남중국해 문제에 간섭하는 것에 반대한다”고도 했다. 물론 미국을 겨냥한 것이다. 중국으로선 듣고 싶은 얘기들을 거의 다 들은 셈이다. 중국은 미국을 멀리하고 중국과 가까워지려 하는 두테르테 대통령에게 레드 카펫을 깔아주며 반겼다.

 중국이 들떠 있는 이유는 필리핀이 ‘주변국 길들이기’의 성공 사례가 될 가능성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시진핑(習近平) 체제 들어 본격적으로 미국에 맞서기 시작한 중국은 주변국 외교에 많은 공을 들였다. 중국 뜻을 거스르는 나라엔 협박과 경제 제재로 본때를 보여주고, 내민 손을 붙잡는 국가엔 돈 보따리를 푸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동안 필리핀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6월 퇴임한 베니그노 아키노 전 대통령은 미군에 필리핀 재주둔 길을 열어줬고 남중국해 합동순찰도 시작했다. 또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를 국제중재재판소에 제소해 중국을 상대로 승소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필리핀은 지난 4년간 중국으로의 과일 수출길이 막히고 관광과 투자에서 불이익을 받았다. 중국의 경제 제재와 두테르테의 맞장구가 결합돼 나타난 필리핀의 극적인 ‘U턴(미국→중국)’ 현상을 주변국들이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다.

 그렇다고 중국이 샴페인을 터뜨리기에는 아직 이르다. 즉흥적이고 막말을 일삼는 두테르테 대통령의 본심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 측에선 영유권 분쟁 대상인 스카버러 암초에 대해 필리핀이 중국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조건하에 필리핀에 대규모 경제 지원을 할 수 있다는 얘기들이 희망사항처럼 흘러나온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이를 수용하긴 쉽지 않다. 필리핀 쪽에선 사실상 주권 포기로 여겨질 경우 탄핵 대상이 될 것이라는 경고음이 울린다. 또한 대통령만 ‘뒤로 돌아’라고 했을 뿐 필리핀 국민 여론은 중국에 여전히 부정적이다.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76%가 ‘미국을 매우 신뢰한다’고 답했다. ‘중국을 매우 신뢰한다’는 응답자는 22%밖에 안 된다.

 일각에선 마키아벨리처럼 권모술수에 능한 두테르테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 도박을 벌이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전문가들은 중국으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거나 중국이 영유권 분쟁 섬에 군사 시설을 설치하는 등 레드 라인을 넘을 경우 다시 미국 쪽으로 회귀할 수도 있다고 본다.

 중국이 지금 필리핀과 밀월을 꿈꾸고 있듯 지난해 가을엔 중국 전승절 열병식을 전후해 한국에 대해서도 최상의 관계를 운운했다. 하지만 반년도 지나지 않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놓고 험한 소리를 쏟아냈다. 국가원수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과 정권 교체 필요성을 거론하는 등 패권주의 속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백번 양보해 중국으로선 믿었던 한국에 발등이 찍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처음부터 한국은 미국을 멀리하고 중국과 가까워지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그건 중국의 착각이다. 북한의 후견국이라는 레버리지를 이용해 북핵 문제 해결에 활용하려 했던 것이다.

 두테르테가 중국 품에 안기는 것은 단기적으로 중국에 외교적 승리를 안겨주겠지만 제대로 된 평가는 상당히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철저한 실용주의자인 두테르테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가 낭패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중국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성동기 국제부 차장 esprit@donga.com
#두테르테#중국 방문#버락 오바마#시진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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