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진]선불(先拂) 노벨 평화상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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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러일전쟁을 중재한 공로로 1906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제국주의자’로 불릴 만큼 평화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스페인과 전쟁할 때는 민병대를 조직해 싸울 정도로 전투에 앞장섰고 ‘먼로주의’를 내세워 유럽 열강이 남미에 얼씬도 못 하게 막았다. “올바른 외교정책은 부드럽게 말하며 큰 막대기를 드는 것”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루스벨트가 상을 받기 1년 전 독립한 신생국 노르웨이가 막강한 우방국이 필요해 의도적으로 그를 골랐다는 말도 있다.

 ▷앨버트 루툴리 아프리카민족회의 의장(1960년), 안드레이 사하로프 소련 반체제 인사(1975년), 아웅산 수지 미얀마 외교장관(1991년)도 인권에 대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탔다. 하지만 인권과 평화는 보는 시각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개념이다. 나치 독일의 양심수인 카를 폰 오시에츠키가 1935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자 히틀러는 모든 독일인의 노벨상 수상 불가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 화풀이했다.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1989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됐을 때는 중국이 반발했다.

 ▷한국 유일의 노벨상 수상자인 김대중(DJ)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 제정 100주년인 2000년에 상을 받았다. 그해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역대 정부는 DJ의 노벨 평화상 수상을 막기 위해 ‘산림정책’ ‘조선사업’ 같은 이름의 공작을 벌였다고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이 회고록에서 밝혔다. 정작 이 전 원장도 1995년부터 DJ를 위해 노벨 평화상 사전 정지작업에 나섰다. 이런 큰 상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만으로는 안 되는 모양이다.

 ▷올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는 후안 마누엘 산토스 콜롬비아 대통령이다. 52년간 계속되는 콜롬비아 내전을 종식시킬 평화협정안을 이끌어낸 공로가 인정됐다. 국민투표에서 한 차례 부결된 평화협정을 완수하라는 의미로 주는 선불(先拂) 노벨상이다. 2009년 취임한 지 1년도 안 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에게 안긴 노벨 평화상보다 나은 편인가.
 
이진 논설위원 leej@donga.com
#후안 마누엘 산토스#콜롬비아대통령#노벨평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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