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케인 ‘카트리나’ 악재 딛고 다시 태어난 도시 뉴올리언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18일 16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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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29일 최고 시속 280km의 초대형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 남부 루이지애나 주 최대 도시이자 ‘재즈의 본고장’ 뉴올리언스를 강타했다. 도시 전체의 80%를 침수시킨 허리케인에다 국가권력의 무능과 구조 실패가 겹치면서 무려 1833명이 숨지고 123조 원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미 역사상 최악의 자연재해인 동시에 세계 최강대국의 민낯과 치부를 여실히 드러낸 인재(人災)이기도 했다.

미국은 재난 발발 후 1년여가 지난 2006년 재난관리개혁법(일명 포스트 카트리나 법)을 발효한 후에야 본격적인 재건 작업에 돌입했다. 이달 초 루이지애나 주 경제개발청(LED) 초청으로 찾은 뉴올리언스는 10년 전과는 딴판으로 활기에 넘쳤다. 여기에는 과감한 규제개혁과 창업정신으로 시를 재난의 도시에서 혁신의 도시로 바꾼 민관의 노력이 있었다.

●불야성을 이룬 프렌치 쿼터

6일 0시 뉴올리언스 최고 관광지인 프렌치 쿼터의 버번 스트리트. 18세기 초 프랑스 이민자들이 조성한 이 곳에는 발코니 등 당시 유럽 건축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한 건물과 프랑스어 간판들이 넘쳐나 마치 18세기 프랑스로 시간여행을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10월인데도 30도를 넘나드는 무더운 날씨에 관광객들은 얇은 여름옷만 걸친 채 거리 곳곳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길 양쪽에 즐비한 재즈 바에서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왔고 뉴올리언스의 유명 카페 ‘카페 뒤 몽드’나 산책로가 조성된 미시시피 강가에도 인파가 북적였다. 겉으로는 10년 전 대재앙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곳에서 만난 관광객 루이스 마르티네스 씨(35)는 뉴올리언스에서 차로 약 5시간 거리인 미 4위 도시 휴스턴에서 주말을 즐기러 왔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기자에게 “고층빌딩이 가득한 다른 대도시와 달리 뉴올리언스에는 어디에도 없는 낭만과 향수가 있다”며 “낡고 어둑한 공연장에 앉아 눈을 감고 재즈를 즐기는 맛이 그만”이라고 엄지를 들어보였다.

시 세수(稅收)의 약 40%를 차지하는 최대 산업인 관광업도 호황이다. 2014년 뉴올리언스를 찾은 국내외 관광객은 952만 명으로 5년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카트리나 직후인 2006년 관광객이 370만 명에 그쳤던 것과 대조적이다. 뉴올리언스의 관문인 루이 암스트롱 국제공항에는 매일 45편의 국내외 직항편이 취항하는데 이 역시 10년 전 42편보다 많다.

인구 유입도 가파르다. 카트리나 직전 48만5000명이었던 뉴올리언스 인구는 카트리나 발발 다음해인 2006년 22만3000명까지 줄었다 2014년 말 종전의 약 79%인 38만4000명을 회복했다. 미 인구통계국에 따르면 2010~2014년 뉴올리언스 인구 증가율은 11.8%로 미 50대 대도시 중 오스틴(15.5%)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2005년 약 110만 명이던 메트로 뉴올리언스(뉴올리언스 시와 인근 메터리, 보갈루사 등을 합한 지역) 인구는 카트리나 직후 약 70만 명까지 줄었으나 최근 124만 명으로 카트리나 전보다 인구가 더 늘었다.

2010년부터 재임 중인 미치 랜드류 뉴올리언스 시장(55)은 “카트리나 당시 자원봉사로 미 전역에서 몰려왔던 젊고 유능한 인재들이 뉴올리언스의 아름다운 풍광, 낮은 물가 등의 매력에 빠져 이 곳을 새로운 삶의 터전 겸 창업 전진기지로 이용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인구 증가세가 계속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실리콘바이유(Slicon bayou)

카트리나는 관광과 에너지 산업에 크게 의존하던 뉴올리언스의 경제 구조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2005년 한 해에만 뉴올리언스에서 9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고 이로 인한 임금 손실도 30억 달러에 달했다. 기존의 일자리는 없어졌고 살아남으려면 무엇이라도 해야 하니 과거와 다른 일을 해야 했던 셈이다.

또 눈 앞에서 가족이 익사하고 집이 통째로 잠기는 것을 봐야했던 메트로 뉴올리언스 거주 이재민 40만 명의 상당수는 뉴올리언스로 되돌아오지 않았지만 다른 지역에서 뉴올리언스로 이주한 사람들은 영화, 정보기술(IT), 생명과학, 수자원 관리 등 다양한 신산업에 종사하며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로 인해 현재 영화와 정보기술 산업은 각각 이 분야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할리우드(LA)나 실리콘밸리(샌프란시스코)에 견줘도 손색이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뉴올리언스 시와 루이지애나 주 역시 각종 세제 혜택과 낮은 금리의 대출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이들의 창업을 지원하고 있다.

현재 뉴올리언스에서는 인구 10만 명당 471개의 스타트업 창업이 이뤄지는데 이는 미 평균보다 67% 높은 수치다. 뉴올리언스 시 역시 지역 주민을 고용한 IT 스타트업에게 운영비의 25%, 임금의 35%를 세액공제 해주고 있다. 미 언론은 샌프란시스코, 뉴욕에 이어 미 스타트업의 새로운 메카로 각광받는 뉴올리언스를 실리콘바이유(Slicon bayou)라 부른다. ‘바이유’는 강 주변의 늪지대를 의미하는데 미시시피 강 하류에 위치한 뉴올리언스에는 이 바이유가 매우 많다. 이를 실리콘밸리와 합친 신조어가 바로 실리콘바이유다.

뉴올리언스의 경제개발 및 투자유치를 담당하는 반관반민(半官半民) 기구인 그레이터뉴올리언스(GNO)의 마이클 헥트 최고경영자(CEO·45)는 “스타트업 창업은 고학력 젊은이들의 고임금 일자리 창출로 직결되는데다 이들이 자신을 위한 소비를 아끼지 않기 때문에 외식, 레저, 패션 산업 등으로의 파급 효과도 크다”고 설명했다.

뉴올리언스 시는 ‘핫 플레이스’ 세인트로치마켓의 부활도 주도했다. 뉴올리언스 시청과 각종 기업 본사가 몰려있는 신도심 센트럴비즈니스디스트릭트(CDC)에서 약 30분 떨어진 시 동쪽에 위치한 이 곳은 단순한 식당이 아니라 IT 분야에 종사하는 젊은이들이 먹고 마시고 사업을 논의하는 사랑방 역할을 한다.

1875년 설립된 세인트로치마켓은 원래 서울의 노량진 수산시장과 유사한 서민 전용 시장이었다. 흑인들이 즐겨 찾던 이 곳은 카트리나로 완전히 침수됐고 이후 몇 년간 폐허로 방치됐다. 뉴올리언스 시는 2010년 원래 소유주로부터 약 65만 달러를 주고 이 건물을 산 뒤 4년 간 370만 달러의 리노베이션 비용을 들여 올해 4월 재개관했다. 깔끔하고 현대적인 인테리어를 지닌 건물 안에는 세련된 외양을 한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각종 해산물 요리, 디저트와 커피, 칵테일 등을 즐긴다.

2009년 뉴욕에서 설립된 세계적인 스타트업 킥스타터도 뉴올리언스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킥스타터의 공동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인 중국계 미국인 페리 첸(38)은 원래 뉴올리언스의 무명 음악가 겸 공연 기획자였다. 콘서트를 열고 싶어도 장소 대관 및 장비 섭외에 드는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이를 포기한 경험이 많았던 그는 인터넷 등을 통해 불특정 다수로부터 자금을 모으는 투자 방식인 크라우드펀딩에 관심을 갖게 됐고 찰스 아들러, 얀시 스트리클러 등과 킥스타터를 창업했다. 이 회사가 6년간 조달한 자금은 총 20억 달러(약 2조3800억 원)가 넘는다.

헥트 CEO는 “사실 스타트업 창업 지원에 그리 많은 돈이 들지 않는다. 도시 외곽의 땅을 시세보다 조금 낮은 비용에 빌려주고 인터넷과 프린터 정도만 지원해줘도 충분하다. 하지만 그 효과는 엄청나다”고 말했다. 이어 “금융위기를 겪은 뉴욕이 당시 마이클 블룸버그 전 시장이 IT 창업을 독려하며 ‘실리콘앨리(실리콘밸리와 뒷골목을 뜻하는 영어 alley의 합성어로 구글 등 대형 IT 기업이 몰려있는 맨해튼 서남부 지역)’를 만들어냈듯 실리콘바이유도 뉴올리언스 경제를 완전히 바꿔놓았다”고 평가했다.

●남부의 할리우드

뉴올리언스 영화협회에 따르면 2014년 루이지애나 주에서 촬영된 장편 영화는 총 18편으로 캘리포니아 주와 캐나다(각각 15편), 영국(12편)보다 훨씬 많았다. 이에 미 언론은 뉴올리언스를 ‘남부의 할리우드(Hollywood south)’라 부른다.

뉴올리언스 소재 민간 싱크탱크인 데이터센터의 앨리슨 플라이어 소장(54)는 “아름다운 자연환경, 겨울에도 눈이 오지 않는 날씨, 대도시보다 싼 인건비를 보유한 덕에 전 세계 영화, 드라마 제작자들이 뉴올리언스에 몰려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루이지애나 주 경제개발청(LED)에 따르면 2014년 루이지애나 주 생산직 근로자의 연평균 임금은 3만6400달러로 미 평균 4만3600달러보다 훨씬 낮다. 산업용 전기와 천연가스 요금도 미 50개 주 중 가장 낮은 수준이다.

루이지애나 주는 1편의 영화 촬영비 중 30만 달러 이상의 금액에 대해서는 30%의 세액공제를 해 주고 있다. 다른 주가 세액 공제가 아예 없거나 한 자리 수의 세액공제를 해주는 것과 비교하면 파격적 혜택이다. 루이지애나 주는 또 1편의 영화 촬영 시 소요되는 전체 인건비 중 10%를 지역민에게 지급하면 10%의 세액공제를 추가로 해준다.

이런 노력 끝에 2014년 한 해 루이지애나 주가 영화 산업으로 벌어들인 돈은 5억900만 달러애 달한다. 이중 33%인 1억6800만 달러가 큰 인기를 끈 블록버스터 ‘쥬라기 월드’ ‘터미네이터: 제네시스’ 단 두 편으로부터 생겨났다.

유명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 총괄을 맡은 ‘쥬라기 월드’는 뉴올리언스 외곽에 버려져 있던 한 테마파크를 재활용해 만들어졌다. 제작진은 카트리나로 인해 폐허가 됐던 이 곳을 약 2달 만에 무려 축구장 6개 크기의 촬영장으로 바꿨고 이 안에 큰 길, 호텔, 음식점, 나이트 클럽, 카페 등을 지었다. 이 영화는 전 세계에서 16억6500만 달러의 흥행 수입을 거둬 아바타(27억8800만 달러)와 타이타닉(21억8680만 달러)에 이어 역대 3위를 차지했다.

2013년 말 개봉 후 2014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노예 12년’, 2013년 흥행작 ‘나우 앤 씨 미’ 등도 역시 뉴올리언스에서 만들어졌다. 2015년에도 캐리비안의 해적 5, 판타스틱 4, 혹성탈출 속편 등 쟁쟁한 흥행 예정작들이 촬영됐다. 이에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 커플, 샌드라 블록, 채닝 테이텀 등 유명 영화배우들도 속속 뉴올리언스에서 집을 사들이고 있다.

뉴올리언스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제작도 활발하다. 2003년 첫 방영 후 지금까지 전미 시청률 1,2위를 놓치지 않고 있는 인기 드라마 NCIS의 자매편인 NCIS 뉴올리언스가 지난해 첫 방영을 시작했고 트루 디텍티브,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스왐프 피플 등도 인기리에 촬영되고 있다.

‘남부의 할리우드’에 위기의식을 느낀 할리우드의 근거지 캘리포니아 주는 2014년 촬영비의 20%에 대한 세액공제, 특히 로스앤젤레스(LA)에서 촬영하면 5%의 추가 공제를 해주는 조건을 내걸며 맞불을 놓기도 했다.

플라이어 소장은 “관광업은 물론 뉴올리언스의 중요 산업이지만 주로 저소득층의 저임금 일자리에 국한돼 있고 경기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문제점이 있다”며 “그런 면에서 최근 뉴올리언스의 산업 다변화는 매우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뉴 머니·블루 블러드’의 시대로

뉴올리언스의 별칭은 굉장히 쉽다는 뜻의 ‘빅 이지(Big Easy)’다. 낙천적이고 느긋하며 시간에 쫓기지 않는 뉴올리니언(New Orleanian·뉴올리언스 사람들이 스스로를 일컫는 단어)들의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 20세기 초 미국이 엄격한 금주법을 시행할 때도 뉴올리언스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이 쉽게 술을 구하고 마셨기에 이 말이 생겨났다는 속설까지 있을 정도다.

강과 바다를 끼고 있고 천연가스, 원유, 목재 등 각종 원자재가 풍부한 뉴올리언스는 미시시피 강 개발이 한창이던 1840년대 미 3대 도시였을 정도로 번성했다. 20세기에도 줄곧 미 20대 도시 안에 들었으나 오일 쇼크가 온 1970년대 이후 쇠퇴의 길을 걸어 현재 미 50위 도시에 불과한 상태다. 즉 카트리나가 휩쓸고 가기 전에도 뉴올리언스 경제는 수십 년간 좋지 않았고 이로 인한 주민들의 박탈감, 패배의식이 심했다는 뜻이다.

뉴올리언스에서 5대째 살고 있다는 변호사 스콧 휘태커 씨(55)는 이를 ‘부자의 저주(curse of rich)’라는 용어로 설명했다. 악착같이 일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먹고 사는 것이 보장되다 보니 지방 정부와 주민 모두 이에 안주하기만 했고 외부 투자와 신기술을 받아들이는데 인색했다는 뜻이다. 그는 “현재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 있는 델타항공 본사, 플로리다 주 올랜도에 있는 테마파크 디즈니랜드도 모두 해당 기업이 먼저 뉴올리언스에 건립 제안을 했었다. 하지만 이로 인한 경제적 부가가치를 과소평가한 뉴올리언스 시가 오히려 이를 거절하는 우를 범했다”고 설명했다.

휘태커 변호사는 기자에게 ‘레드 블러드(red blood·토종)와 블루 블러드(blue blood·외부인)’, ‘올드 머니(old money·토종의 돈)와 뉴 머니(new money·외부인의 돈)’라는 말도 알려줬다. 레드 블러드(red blood)는 18세기 초 뉴올리언스 개척 시대부터 줄곧 이 곳에 둥지를 튼 토종 뉴올리니언들을 말한다. 인간의 피와 같은 자연 색깔, 즉 원래부터 있었던 존재라는 뜻에서 레드 블러드로 불린다. 반면 블루 블러드는 원래 존재하지 않는 것, 즉 이방인을 일컫는다.
그는 “레드 블러드의 돈을 올드 머니, 블루 블러드의 돈을 뉴 머니라고 하는데 카트리나 이전에는 뉴올리언스 경제가 뉴 머니를 달가워하지 않고 올드 머니에 의존하는 경향이 컸다”며 “델타와 디즈니의 제안을 거절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덧붙였다.

뉴올리언스가 이런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다른 도시에 뺏기고 쇠퇴하는 동안 인근 휴스턴(4위), 샌안토니오(7위), 댈러스(9위), 오스틴(11위)는 모두 미국에서 손꼽히는 대도시로 급성장했다. 젊은 인재들이 속속 근교 대도시로 빠져나가고 외부 투자는 더디게 들어오면서 경제의 쇠퇴 속도가 더 빨라졌다. 주민들의 박탈감과 열패감도 한층 높아졌다.

카트리나는 이런 관행을 완전히 깨부수는 기폭제가 됐다. 도시 전체가 완전히 폐허가 된 상황에서 토종인지 아닌지, 누구의 돈을 우선해야 할 지를 따질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 헥트 CEO는 “카트리나 이후 주민들 사이에 ‘무슨 일을 하든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식으로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널리 형성됐다”며 “과거와 똑같은 방식을 되풀이하면 또 다른 재앙을 맞이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뉴올리언스 경제 회생의 원동력”이라고 강조했다.

뉴올리언즈=하정민기자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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