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이 본 세상]‘포스트 반기문’ 대망론, 유엔에 女風이 분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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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대통령’ 유엔 차기총장 선거모드

“국제사회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합니다. 따라서 유엔에 대한 기대와 수요도 어느 때보다 큽니다. 저는 남은 임기 동안 제 직무 수행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71)은 최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과의 연루설이 불거졌을 때 이렇게 말하며 선을 그었다. 반 총장은 지난해 이른바 ‘반기문 대망론’이 나왔을 때도 같은 말을 했다.

성완종 게이트로 수사가 급물살을 타면 그 불똥이 누구에게 튈지 장담할 수 없지만 반 총장의 임기는 한국 상황과 무관하게 내년 12월 31일 끝난다. 하지만 ‘실질적인 남은 임기’는 1년 남짓에 불과하다는 것이 유엔 관계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다음(제9대) 사무총장을 향한 도전을 선언하는 후보가 속속 등장하고 있는 데다 ‘사무총장 선출 과정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유엔 안팎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유엔도 선거 국면으로 빠져들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대선(내년 11월) 도전을 선언한 민주-공화 양당의 대선주자들이 늘어나면서 현직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보다 차기 대권 잠룡들의 움직임에 여론의 시선이 더 쏠리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 유엔에서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미 대선의 최대 관심이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될 수 있느냐’인 것처럼, 차기 사무총장 선거전 이슈도 ‘첫 여성 수장이 탄생하느냐’에 집중되고 있다. 또 ‘유엔 193개 회원국, 세계 70억 인구를 대표하는 유엔 사무총장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5개국(P5)의 밀실 거래로 선출하는 관행을 이번에는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는 개혁론도 만만치 않다.

27일(현지 시간) 유엔총회 회의장에선 이 문제가 공개적으로 논의될 예정이다. 국제시민단체연대조직인 ‘1for7Billion’(70억 명을 위한 한 자리)은 최근 193개국 유엔 회원국 대표들과 시민단체들에 서한을 보내 “27일 유엔총회 논의를 시작으로 유엔 사무총장 선출 절차가 보다 공정하고 투명해질 수 있도록 세계 여론을 모아가자”고 촉구했다.

“최초의 여성 유엔 사무총장 탄생할까”

‘동유럽 출신의 여성, 유엔 근무 경험이 있으면 금상첨화.’

미국 뉴욕 맨해튼 유엔본부에서 직원들과 출입기자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차기 사무총장의 3대 조건이다. 이 ‘복도 통신 사무총장감 0순위 인물’이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63). 몇몇 기자들은 그를 “차기 총장 선거의 힐러리”라고 부를 정도. 그만큼 강력한 후보란 뜻이다.

보코바 사무총장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유엔 회원국들과 비정부기구(NGO)들 사이에 ‘이제는 여성 유엔 수장이 나올 때가 됐다’는 공감대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국인 불가리아 정부는 그를 총장 후보로 공개 추천하고 선거운동을 시작한 상태.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동유럽 출신이 된 것도, 여성이 된 것도 그가 처음이었다. 그 여세를 차기 유엔 사무총장 도전으로 이어갈 기세다. 유럽지역 언론들도 “보코바 사무총장은 외교장관으로 재직할 때 불가리아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럽연합(EU) 가입을 이끄는 리더십을 보였고 미국과 러시아에서 공부해 영어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고 극찬하고 있다. 또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실력도 수준급이다. 유엔 공식 6개 언어 중 중국어와 아랍어를 제외한 4개 국어에 능통한 ‘준비된 총장감’이란 얘기다.

‘동유럽 출신’과 ‘여성’이란 조건이 부각되는 이유는 유엔 70년 역사상 그런 사무총장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역대 8명의 사무총장을 출신지역 그룹으로 분류하면 서유럽 3명, 아시아와 아프리카 각 2명, 중남미 1명이다. 그래서 동유럽 국가들이 “이번은 확실히 우리 차례”라고 주장한다. 또 영국 가디언 등 서방 언론들은 “유엔 사무총장직은 21세기에 드물게 남아 있는 ‘금녀(禁女)의 요새’ 같다”고 지적해왔다. 가디언이 지난해 독자들을 상대로 ‘여성이 유엔을 이끌 때가 됐다고 생각하느냐’는 여론조사에서는 무려 92%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국제 여성단체들은 최근 “지금까지 유엔 사무총장 8명이 다 남자였다. 9번째는 여자여야 한다”는 취지의 홈페이지(www.womansg.org)를 개설해 여성 총장감 21명 명단을 게시하고 세계적으로 ‘여성 후보’ 추천을 계속 받고 있다.

보코바 사무총장 이외에도 ‘동유럽 출신 여성’ 조건을 갖춘 인물로는 △리투아니아의 달리아 그리바우스카이테 대통령(59) △크로아티아의 베스나 푸시치 부총리 겸 외교장관(62) △불가리아의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EU 집행위원(62) 등이 있다. 동독 출신인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61)도 끊임없이 거론되는 ‘거물급 다크호스’.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인 그가 예정된 2017년 총선 전에 총리직을 사임하고, 최초의 유엔 사무총장을 노릴 수 있다’는 예측 보도가 유럽 언론에서 이어지고 있다.

‘동유럽 출신 남성 후보’인 세르비아의 부크 예레미치 전 외교장관(40)은 ‘유엔총회의장 출신의 젊은 피’란 점을 앞세워 공식 선거운동에 돌입했고, 슬로베니아의 다닐로 튀르크 전 대통령(63)도 정부의 공식 지원을 받고 선거전에 뛰어든 상태다.

돌발 변수는 민주화 바람과 우크라이나 사태

한 유엔 고위관계자는 기자에게 “다음 사무총장이 동유럽 출신이 유력하다는 데 이견이 없지만 미국과 러시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사태’가 예상 밖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동유럽 출신 후보가 미국 편을 들면 러시아가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고, 그 반대면 미국이 저지할 것이 뻔하다는 설명이다.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는 이와 관련해 “‘동유럽 후보군 우물’은 (우크라이나 사태 때문에) 이미 심각하게 오염돼 버렸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미러 양국 간 극적인 화해 모드가 조성되지 않는 한 그 사이에 낀 동유럽 후보들의 입지가 위태로울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경우 다른 지역 출신 여성 후보가 일종의 어부지리(漁夫之利) 효과를 볼 가능성이 있다. 사무총장을 1번밖에 배출 못한 중남미 지역에서 △칠레의 미첼 바첼레트 대통령(64) △멕시코의 알리시아 바르세나 유엔 중남미카리브해경제위원회(ECLAC) 사무총장(63) △코스타리카의 레베카 그린스판 전 유엔개발계획(UNDP) 부총재(60) △콜롬비아의 마리아 앙헬라 올긴 외교장관(52) 등이 여성계가 주목하는 인물들이다. 최근 비리 스캔들로 탄핵 위기에까지 몰린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68)도 후보군엔 포함돼 있다.

뉴질랜드의 헬렌 클라크 UNDP 총재(65·전 뉴질랜드 총리)와 나이지리아의 아미나 모하메드 유엔 ‘포스트 2015 개발계획’ 사무총장 특보(54·전 유엔환경계획(UNEP) 사무차장)는 유엔 내부 인사들이 주목하는 인물들. 한 유엔 출입 기자는 “‘대륙별 순환 불문율 사수’보다 ‘리더십과 유엔 업무 전문성을 갖춘 첫 여성 사무총장 탄생’에 세계 여론의 무게가 실리면 두 사람이 강력한 후보로 급부상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국제연대 ‘1For7billion’이 사무총장 선출 방식 개혁을 주창하며 가장 앞세운 원칙도 “현실정치 논리가 아닌, 능력과 자질로 사무총장 후보 간 우열이 가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무총장 ‘밀실 선출’과 반복되는 민주적 정통성 논란


유엔 사무총장은 흔히 ‘세계 대통령’ ‘지구촌 최고의 외교관’ ‘가장 불가능한 직업’ 등으로 칭송되곤 한다. 4만여 직원, 수십 개 산하기구, 천문학적 규모의 각종 지원 자금 등을 총괄하기 때문에 ‘최강국 미국 대통령의 정치적 지위와 가톨릭 교황의 도덕적 권위를 합쳐 놓은 자리’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사무총장(Secretary-General)의 영문 머리글자(SG)는 ‘희생양(scapegoat)’의 줄임말”이란 국제적 조롱도 끊임없이 받는다. 서방 언론들이 “명예만 높고, 실권(real power)은 없는 자리”라고 지적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1For7billion’ 운동을 이끄는 주역 중 한 명인 윌리엄 페이스 세계연방운동 이사는 “유엔 사무총장의 이런 모순은 구체적 후보 조건과 선발 절차도 없고, 어떤 투명성과 책임성도 확보되지 않은 채 ‘P5의 정치적 밀실거래’로만 선출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유엔 헌장은 이 중요한 사무총장 선출 절차에 대해 ‘유엔 안보리가 추천하고 유엔 총회가 승인한다’는 단 한 줄의 규정만 있을 뿐이다. 뉴욕타임스(NYT) 등은 최근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 등 유엔 출신 원로도 대거 동참한 ‘1For7billion’의 활동을 전하면서 “193개 회원국이 참여하는 유엔 총회는 안보리 P5가 합의한 단일후보에 대한 ‘고무도장’ 역할만 해 왔다”고 보도했다. 현재 선출 방식은 193개 회원국 중 192개국이 찬성하는 후보라도, 반대하는 1개국이 거부권을 가진 P5면 사무총장으로 선출될 수 없는 구조적인 비민주성을 안고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역대 사무총장들은 당선과 연임을 위해선 P5의 눈치를 끊임없이 봐야 하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반미 성향 때문에 미국의 반대에 부닥쳐 연임에 실패한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 전 사무총장(6대)조차도 훗날 “미국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유엔 고위직 자리를 미 측에 ‘선물’로 주기도 했다”고 토로했다. 반 총장도 예외이기 어렵다. 2006년 당선 당시 주유엔 미국대사였던 존 볼턴 씨는 훗날 반 총장 지지 이유에 대해 “우리(미국)는 (말 잘 안 듣는) ‘강한 성격의 후보’를 원하지 않았다. 동맹국(한국) 출신에다 기가 약한(weak) 후보를 더 선호했다”고 회고했다. 이 이미지 때문에 반 총장은 아직까지도 출입기자들로부터 “사무총장이 미국 등 P5 의견만 너무 따라가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종종 받곤 한다.

‘폐쇄적이고 비민주적인 사무총장 선출 방식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1990년대 들어서 꾸준히 제기돼 왔다. 1997년엔 유엔 총회 만장일치로 이를 촉구하는 결의안이 채택되기도 했다. 반 총장이 선출되던 2006년 초에도 비슷한 개혁 요구가 캐나다 인도 등 일부 회원국을 중심으로 있었지만 구체적 변화를 이끌어내기엔 원동력과 선거일까지의 기간이 너무 짧았다. 이번은 선거운동이 본격화하기 전인 지난해 11월부터 세계적 규모의 국제연대(1For7billion)가 유엔 회원국과 세계 NGO들에 ‘개혁 동참 촉구’ 서한 등을 보내며 글로벌 여론몰이를 강하게 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 운동의 핵심은 ‘안보리 P5에만 집중된 사무총장 선출 권한을 193개 회원국이 참여하는 유엔 총회에 분산하자’는 것이다. 유엔 주재 외교관들은 “후보들이 유엔 총회에서 청문회 형식의 정견 발표를 하고, 이에 대한 회원국들의 의견을 취합해 안보리에 전달할 수만 있어도 적지 않은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말한다.

유엔 70년 역사상 사무총장 선출이나 연임 결정에 있어서 유엔 총회가 안보리보다 강한 권한을 행사한 적은 1950년의 사례가 유일하다. 당시 트뤼그베 할브단 리 초대 총장의 연임 문제가 P5 간 이견으로 확정되지 못하자 총회가 안보리 추천 없이 연임을 의결해 버렸다. 그 후로 유엔 총회는 안보리 P5의 밀실 결정을 공개 추인하는 거수기 기능만 해 왔다.

뉴욕=부형권 특파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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