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거인’ ‘소프트 독재자’…리콴유, 그는 누구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23일 09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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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타계한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는 ‘싱가포르의 국부’로 통한다. 26년간의 총리 재임기간 중 도시국가였던 싱가포르를 작지만 강한 ‘강소국’으로 발전시킨 그에게는 ‘작은 거인’ ‘소프트 독재자’ 등의 여러 별명이 붙어 다녔다. ‘국가가 개인에 우선한다’는 철학으로 개발독재 방식을 추구해 한국의 박정희 전 대통령과도 종종 비교된다.

● 시대를 만든 인물


싱가포르는 국가 브랜드가 뚜렷하다. 싱가포르는 부패가 적고 거리가 깨끗한 나라라는 긍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 반면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에게도 태형을 때려 체벌하는 나라라는 부정적 이미지도 따라다닌다. 이같은 싱가포르 이미지는 리 전 총리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동갑내기 외교계 거물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그를 ‘시대를 만든 인물’이라고 극찬했다.

소년 리콴유는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1923년 싱가포르로 이주한 중국계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나 풍족하게 자랐다. 하지만 그의 집안은 영국식 사고와 생활방식을 따랐다. 국제 증기선에 일하며 영국인 선원들의 합리적 사고방식을 경험한 할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할아버지는 리콴유를 ‘해리’라 부르며 중국어보다 영어를 먼저 가르쳤다.

리콴유는 1935년 명문 래플스학교에 수석 입학했고 졸업할 때도 수석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평온한 일상은 1942년 태평양 전쟁을 겪으며 무너졌다. 전쟁 통에 집안 형편이 기울면서 생활전선에 내몰린 것. 그는 암시장에서 고무풀을 내다팔았다. 또 일본군 선전부에서 근무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이 시기 그는 현실에 눈 떴다. 특히 할아버지의 죽음은 그를 정치적으로 각성시켰다. 이웃들이 수시로 일본군에 끌려가는 상황에서 그는 용케 살아남았다. 훗날 그는 “일본군 치하에서 권력을 차지하고 사람을 다스리는 정치의 속성을 몸으로 익혔다. 결국 살아남았다는 점에서 나를 ‘여우’라 불러도 좋다”고 회고했다.

종전 뒤 그는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영국 변호사 자격증을 따고 1950년 고국에 돌아온 그는 영국 변호사 존 레이콕의 사무실에 들어갔다. 이후 그는 진보당 후보로 출마한 상사의 선거운동을 도우면서 운명처럼 정치에 첫발을 내딛었다.

1951년엔 더 큰 기회가 찾아왔다. 전국 최대 규모인 집배원·전화교환수 노조가 그에게 일은 맡긴 것. 리콴유는 사건을 매끄럽게 해결해 일약 스타 변호사로 떠올랐다.

이후 그의 정치 행보는 탄탄대로를 달렸다. 노동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얻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1954년 인민행동당(PAP)를 창당했다. PAP는 1959년 5월 온건·합리 노선으로 다양한 민족의 지지를 받으며 집권당이 됐다. 리콴유는 자동으로 초대 싱가포르 자치정부 총리에 취임했다.

● ‘살아남아야 한다’

그는 곧바로 팔을 걷어붙였다. 서울시만한 면적에 자원도 인구도 부족한 도시국가. 리 전 총리는 싱가포르 홀로 성장하기엔 역부족이란 생각에 말레이시아 연방 가입을 결단했다. 하지만 양측 관계는 말레이시아의 일방적인 추방으로 끝났다. 말레이시아에겐 사사건건 목소리를 높이는 중국계 총리가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그는 국가 발전의 밑그림을 그렸다. 이스라엘의 자문을 받아 군대를 창설한 뒤 경제로 눈을 돌렸다. 싱가포르는 경제발전 모델로 이스라엘을 따랐다. 양국은 적대적 국가에 둘러싸여 있고 자원이 없는 소국이란 점에서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리 전 총리는 이스라엘처럼 주변국이 아닌 미국 유럽 등 선진국과 주로 교역했다. 다국적 기업이 7000여 개에 달하는 지금의 대외개방 정책도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당시 야권은 당시 유행했던 ‘제국주의 국가가 제3세계를 착취한다’는 종속이론을 들어 그의 경제정책에 반대했다. 리 전 총리는 “이론도 먹고 살 수준이 돼야 논할 수 있다”며 밀어붙였다.

경제가 부흥하면서 지도층의 도덕적 해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리 전 총리는 “부패는 망국의 지름길”이라며 엄벌로 다스렸다. 측근도 봐주는 법이 없었다. 1986년 개국공신이자 최측근인 태 치앙완 국가개발부장관이 두 차례에 걸쳐 40만 싱가포르 달러의 뇌물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자 그는 망설임 없이 구속수사를 지시했다. 결국 태 장관은 감옥에서 자살했다.

본인에게는 더 엄격했다. 1995년 부동산 급등으로 자신의 일가에 대한 투기 의혹이 일자 조사를 자청했고, 무혐의 결론이 난 뒤에는 차익을 모두 기부했다. 싱가포르의 청렴 풍토는 이런 바탕에서 싹텄다.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 동아일보DB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 동아일보DB

● ‘아시아적 가치’


리 전 총리는 “질서를 넘어선 자유는 용납되지 않는다”며 강력한 법치로 다스렸다. 태형은 이러한 철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재임시절 담배꽁초 투기, 화장실 물 내리기 등 사소한 부분까지 통제했다. ‘일일이 간섭하는 유모국가’라는 국제사회의 비판에 그는 “정부는 국민을 교육하고 올바른 생활습관을 가르칠 의무가 있다”고 반박했다.

원칙주의는 외교계에서도 빛을 발했다. 1988년 자국민을 살해한 인도네시아 군인 2명을 사형시켰고, 1993년 미국 청년 마이클 페이가 싱가포르의 질서를 어지럽히자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압박을 받으면서 끝까지 태형을 집행했다.

그의 사상은 ‘아시아적 가치’로 요약된다. “서양은 사회질서 유지 기능이 정부로 넘어간 반면 아시아는 가족문화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기에 지도자는 국민의 생활을 통제하고 잘못하면 매를 때려도 된다”는 게 골자다.

그는 1994년 미국 정치잡지 ‘포린 어페어스’를 통해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에 대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3,4월호에서 리콴유가 “아시아에 서구의 민주주의는 맞지 않는다”는 논지를 펼치자, 김 전 대통령은 11·12월호에서 “아시아의 문화도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전통이 있다”고 반박했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두 정치인의 논쟁에 외신들도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또 장기집권으로 ‘개발 독재자’라는 비판에 시달렸다. 1990년 총리에서 물러날 때도 측근에게 권력을 넘긴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평가를 받았고 2004년에 총리직에 오른 현 리센룽 총리는 그의 장남이다. 그의 자녀와 측근들은 대부분 고위 관리로 재직하거나 주요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젊은층을 중심으로 ‘정치 후진국’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다.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도 비판받는 대목이다. 그는 노조를 변호하면서 정계에 입문했지만 노조가 지나친 욕심으로 국익을 해친다고 판단해 파업을 용납하지 않았다.

한국과 싱가포르는 인연이 깊다. 리 전 총리는 박정희 대통령부터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을 모두 만났다. 박근혜 대통령은 1979년 1월 부친 박 대통령이 리 전 총리와 면담할 때 통역을 맡았다.

리 전 총리는 특히 박정희 대통령에 특별한 애정을 보였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한국의 성공을 위한 박 대통령의 강한 의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박 대통령이 없었다면 한국은 산업화를 이루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고 적었다. 퇴임 이후 죽음을 맞기 직전까지 온통 싱가포르에 대한 염려뿐이었던 작은 거인. 그가 일군 싱가포르는 리콴유의 인생 그 자체였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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