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구자룡]국민투표 남용, 민주주의 발상지의 치욕

  • 동아일보

구자룡 국제부 기자
구자룡 국제부 기자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가 발명되었으나 현재 위기에 처한 그리스는 민주주의에 ‘오명’을 남겼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7일자 사설에서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총리의 무책임한 ‘구제금융안 국민투표’ 회부 파동을 이렇게 질타했다. 대의정치하에서 주권자의 뜻을 직접 묻는 국민투표는 ‘직접 민주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지만 지도자가 이것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서는 무책임한 방패막이로 전락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 사례라는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데모크라시)가 ‘대중의 지배’ 나아가 ‘중우(衆愚) 정치’라는 그늘이 있을 수 있음도 상기시켜 주었다.

지난달 31일 파판드레우 총리는 그리스 부채 탕감을 골자로 하는 유럽연합(EU) 정상들의 2차 구제금융 지원안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밝혀 EU 지도자들을 경악시켰다. 긴축정책에 항의하는 시위 대열에 현직 경찰과 판사까지 가세한 터여서 국민투표안이 통과되기는 사실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 점을 명확히 알고 있을 파판드레우 총리가 국민투표 카드를 꺼낸 것은 국민들에게 고통분담을 요구하는 어떤 선택도 하지 않겠다는, 즉 인기를 잃을 수 있는 결정은 어떻게든 회피하겠다는 무책임한 자세의 전형이었다.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긴축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에 순응하는 모양새를 통해 정치 생명을 연장하려는 꼼수라는 지적도 피할 수 없었다. 국민투표에서 EU 지원안 수용이 통과되면 긴축정책 추진에 탄력을 받을 수 있겠지만 부결되면 “국민이 원하지 않았다”고 책임을 국민에게 떠넘기려 했다는 의심을 받아도 그는 할말이 없을 것이다.

EU 정상들이 즉각 1차 구제금융 지원금 중 6차분 80억 유로(약 12조3800억 원)를 지급할 수 없으며 그리스가 유로에서 남을 것인지 탈퇴할 것인지를 선택하라고 압박한 것은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결국 국민투표안은 철회됐고 국가부도 위기도 넘겼다. 파판드레우 총리는 4일 재신임을 받았으나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 나름대로 고군분투했을지 몰라도 무책임한 지도자였다는 오명에서 벗어나기는 어렵게 됐다.

그리스에서 보여준 ‘민주주의의 역설’은 지도자가 당장 돌팔매를 맞더라도 비전과 소신, 때로는 정치적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대 민주주의 발상지 그리스는 공동체의 파국을 막고 자신도 역사 앞에 떳떳이 설 수 있는 지도자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고 있다.

구자룡 국제부 bon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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