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아닌 가슴으로 쓰는 기사… 신문에 휴머니티가 흐른다

  • 입력 2009년 9월 15일 02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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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연수 리포트
프레더릭턴(캐나다)=김수곤 차장
加 일간지 “모든 주제를 인물 통해 드러나게” 편집회의 모토로
“TV 가벼움에 실망한 독자에게 이야기 걸자” 스토리텔링 중시

《6월 초순. 연수 중인 캐나다 프레더릭턴의 세인트토머스대에서 현지 언론을 견학하려고 데일리 글리너 신문사를 처음 찾아가는 길이었다. ‘어라, 이 도시는 왜 U턴 표지판이 없지?’

왼쪽의 신문사 입구를 지나친 후 아무리 직진해도 U턴 표지판이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P턴을 한 뒤에 좌회전하려 했는데

이번에는 좌회전 신호가 없었다. 망연히 1차로에 멈춰 서 있으니 뒤차 운전자가 다가와 “금지표시만 없으면 모든 교차로,

모든 신호등에서 비보호 좌회전을 할 수 있다”고 알려줬다.

데일리 글리너의 뉴스에티터 조엘 오케인 씨에게 이 얘기를 하니 이렇게 대답하며 웃었다. “예. 그게 바로 생각을 유연하게 하는 우리의 문화라고 할 수 있겠군요.”》

○ 언제 어디서든 회전하라

기자가 이 신문을 찾은 것은 스토리텔링형 기사 쓰기에 관해 경험을 나누고, 또 배우기 위해서였다. “스토리텔링의 핵심은 유연함”이라는 것이 오케인 뉴스에디터의 설명이다. 정형화된 기사 작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독자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다면 얼마든지 형태를 바꿔가며 기사를 쓰는 것이다. 잘못 든 길에 대한 두려움 없이 언제 어디서든 회전할 수 있다는 유연한 사고가 스토리텔링식 글쓰기의 바탕이라는 풀이다.

‘모든 사실을 인물 구조로 바라보라. 당신의 기사를 더 생생하고 풍부하게 독자에게 전하고 싶다면 모든 주제를 인물을 통해서 드러나게 하라.’

이 신문사 편집회의실에 걸려있는 캐치프레이즈는 캐나다의 신문이 어떤 기준으로 기사를 쓰고 어떻게 독자와 소통하는지를 압축해서 설명한다. 스토리텔링에 대한 사내 교육과정에 대해 묻자 오케인 씨는 이렇게 말했다.

“스토리텔링은 우리의 문화입니다. 중고교 때부터 체계적으로 스토리텔링에 대한 노하우를 쌓아오기 때문에 따로 직무교육은 하지 않습니다. 프로축구선수를 훈련시킬 때 달리기 노하우를 가르치지는 않는 것과 같죠. 오히려 편집간부들은 기자가 인물 이야기에만 빠져서 사실을 놓치는 경우에만 스토리를 보강해줍니다.”

장애인 기금 마련에 나선 어느 시각장애인 가수에 대한 휴먼스토리 기사를 가다듬는 과정을 살펴보면서 이 신문이 독자와 소통하는 방식을 살펴볼 수 있었다. 담당 기자는 기사를 쓰기 전에 현장 취재한 녹음과 기사의 초고를 에디터 등 10여 명이 모인 사회섹션 기획회의에 제출했다. 펜형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기자의 목소리.

‘링컨가 48번지. 차에서 내려 걸어가자 새 5마리가 이방인임을 알아챈 듯 머리 위에서 지저귀더니 집 쪽으로 사라짐. 집주인에게 손님의 출현을 알리는지 모두 저편에 있는 집 처마 위에서 이방인을 노려보고 있음. 작은 연못을 빙 돌아 좌우 30cm 정도 막대기를 군데군데 꽂아놓은 게 인상적. 잔디는 누가 손질을 했는지 7∼8cm 높이로 다른 곳보다 좀 길게 잘라두었음. 시각장애인이 넘어질 것을 대비해 충격을 완화하려고 한 게 아닌가 짐작됨. 연못에는 잡초와 이끼 등이 많이 끼어있음. 올챙이 떼가 나를 따라서 집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함. 아까의 새처럼 나를 경계하는 것인지, 맞이하는 것인지 아직 분간할 수 없음. 잘 정돈된 작은 화단이 눈에 들어옴. 시각장애인과 꽃. 화단에 씌워놓은 우산이 눈에 들어옴. 몇 송이의 백합 위에 우산이 씌워져 있음. 오전에 비가 한 차례 내렸는데 설마 꽃을 위해 우산을 씌워놓은 것일까. 누가?’

그의 묘사는 마치 범죄수사관이 범죄현장을 메모한 듯 상세하다. 스토리텔링의 기본 자료가 되는 현장스케치에 충실하기 위해서다. 이 녹음을 들으면서 기자들과 데스크들이 리드(기사의 첫 문장)를 무엇으로 할 것인지 머리를 맞대고 의논했다. 인터뷰 도중에 메모한 실내 소품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날 회의에서는 ‘꽃에 우산을 씌워놓은 이야기’로 리드를 쓰기로 했다.

‘꽃을 보지 않고도 꽃이 얼마나 피어있고,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아는 사람이 있다. 그 꽃이 온갖 비바람을 다 이기고 자라야 함을 알지만, 가랑비 하나에도 꽃봉오리가 다칠까 봐 우산을 받쳐주는 사람이 있다. 나 같은 사람은 더는 없어야 한다고….’

그들은 이 회의를 ‘리드 회의’라고 하는데 30분 넘게 걸린다. 왜 그렇게 많은 시간을 리드에 할애하느냐는 질문에 발행인 낸시 쿡 씨는 답했다.

“리드는 첫인상입니다. 몇 년 전 우리가 독자를 대상으로 이런 여론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어떤 기사를 전부 읽었다면, 어떤 요인이 그것에 가장 영향을 끼쳤습니까?’ 이 질문에 44%가 ‘리드’라고 답했고 ‘제목에 끌려서’(27%), ‘관심 있는 기사라서’(25%) 등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첫 문장의 힘입니다. 과장해서 서술해선 안 되겠지만 가장 인간적인 현장 스케치를 리드로 만드는 것이 저희들의 원칙입니다.”

○ ‘장면’이 아닌 ‘휴머니티’를 담는다

“우리 동아일보에서는 기자들이 소형 동영상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현장 소식을 전합니다. 이런 휴먼스토리도 현장을 비디오로 찍어서 같이 보면 리드를 구성하는 데 좋지 않을까요?”

기자의 질문에 글렌 홀리요크 디자이너는 기다렸다는 듯 잘라 말한다.

“카메라와 동영상은 생생한 장면을 담을 수 있지만 휴머니티를 담을 수는 없습니다. 기자가 직접 현장에 가서 눈이 아닌 가슴으로 느낀 혼잣말. 우리는 그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실습 중 지켜본 편집과정도 ‘독자와 소통하기’의 연장선에 있다. 디자이너와 에디터로 구성된 4, 5개의 섹션 팀이 둘러앉아서 컴퓨터로 지면을 구성하면서 각 면의 메인 제목을 돌아가면서 서로 크게 말했다. 아니, 읊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마치 시 한편을 들려주듯. 제목도 기사와 마찬가지로 ‘독자에게 전달하기’가 아닌 ‘독자에게 말하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자동차 산업을 육성시키려 하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에 관한 기사. 스토리텔링 식의 기사는 아니었지만 편집과정에서 타이틀텔링(제목을 이야기체로 만들기)으로 거듭난다. 'Putin puts Russia in the driver's seat'. 푸틴(Putin)과 put in이라는 같음 음의 동사를 이용해서 ‘푸틴, 자동차산업 육성 추진’이라는 딱딱한 제목이 아닌 ‘푸틴, 러시아를 운전석에 앉히다’라는 제목으로 탄생시킨다.

방송이나 온라인뉴스에 맞서 신문은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하는가. 발행인 쿡 씨는 말했다.

“우리는 그들과 경쟁하지 않습니다. 모두 언론이긴 하지만 각자 걸어야 할 길이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내린 결론은 ‘TV 등의 가벼움에 실망한 독자에게 이야기 걸자’입니다. 스토리텔링이죠.”

캐나다의 토요일자 신문은 서구 다른 나라의 신문과 마찬가지로 논픽션 스토리텔링 기사의 보고다. 1부 가격이 2캐나다달러(약 2300원)가 넘어 꽤 비싼 편인데도 정오가 되기 전 거의 다 팔린다. 날씨 좋은 주말이면 실외 흔들의자에서 단편소설 읽듯 신문을 펼치고 찬찬히 읽어 내려가는 캐나다인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프레더릭턴(캐나다)=김수곤 차장 kiso8859@donga.com

죽은 간디도 인터뷰… 창의력 반짝반짝

■ 加 스토리텔링 교육현장

캐나다는 중고등학교부터 스토리텔링 교육을 중시한다는데 과연 실상은 어떨까.

올 3월 방문한 앨버트스트리트중학교의 ‘잉글리시 아트’ 과목 수업시간. 우리의 국어 과목과 비슷하지만 수업진행 방식은 상당히 다르다.

먼저 교사와 학생이 일대일 상담으로 책을 선정한 후 가정통신문을 통해 ‘학부모 동의’를 받는다. 예를 들어 간디 자서전을 고른 학생은 그 책을 가지고 두 달 이상 공을 들인다. 우선 제출하는 보고서의 종류가 많다. 책의 줄거리를 분석하고 책 중에 나오는 어려운 단어나 전문용어에 관한 보고서를 따로 제출한다. 또 매주 다른 프로젝트를 만들어서 발표해야 한다. 간디가 생존해 있다고 가정해 그를 인터뷰하고 책 내용을 참고해 문답을 만들어 발표한다. 보드에 연대기를 만들어 붙이고 자서전 중의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찰흙 나무 널빤지 등을 이용해 3차원으로 재현한 후 급우들 앞에서 설명하기도 한다. 책을 통한 지식의 습득도 중요하지만 수업의 핵심은 ‘친구들에게 책에 관한 이야기를 더 쉽고 완벽하게 전달하기’이기 때문이다.

사회 시간도 마찬가지. 한 달에 한 번씩 논쟁의 주제가 바뀐다. ‘프로선수 연봉’에 관한 논쟁. ‘너무 높다’와 ‘우려할 수준은 아니다’라는 편으로 갈라서 각각 자료를 수집하고 토론전략을 마련한다. 양편 학생들이 논리구조를 짜는 과정은 치열하다. 자료 수집을 위해 토론토 블루제이스 프로야구단이나 아이스하키팀의 구단관계자, 연봉결정권자에게 e메일로 질문한다. 다른 도시에 사는 프로하키 선수 출신을 직접 찾아가 인터뷰한다. 상대편이 질문하거나 반박할 껄끄러운 예상 질문지까지 만들어서 대비한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나의 의견’과 ‘나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를 잘 다듬어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창의력인데 중고등학교 때부터 그런 습관과 노하우를 키워주고 있는 것이다.

창의력을 길러주는 캐나다 공교육의 비결은 바로 ‘스토리텔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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