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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6월 5일 0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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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의 집권기간(1995∼2007년)은 독일 영국을 비롯한 프랑스의 전통적인 경쟁국들이 세계화의 도전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변화를 모색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오늘날 프랑스인들은 이 기간을 ‘잃어버린 12년’으로 평가한다. 시라크 전 대통령이 집권 초기 내놓은 연금개혁이 좌절되면서 다른 분야의 개혁까지 대부분 좌초하거나 연기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는 집권 초기 닥친 도전을 어떻게 헤쳐 나가느냐가 정권의 순항 여부뿐 아니라 국운의 성쇠까지 가른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초기 ‘좌파 오류 청산’ 기대 받아
지금은 시대착오적인 인물처럼 여겨지는 시라크 전 대통령도 한때는 개혁의 기수였다.
처음 총리를 지낸 1974∼76년에는 낙태와 이혼의 합법화, 18세 성년 인정 등 개혁을 이끌어 프랑스의 현대화에 기여했다. 첫 동거정부(좌파와 우파가 대통령과 총리를 나누어 맡는 정부)에서 내각을 이끈 1986∼88년에는 사회당 소속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의 국유화 조치를 되돌리는 탈(脫)국유화 조치로 프랑스를 정상화하는 데 일조했다.
그런 그가 1995년 미테랑 대통령의 14년 사회당 통치를 끝내고 집권했을 때 국민의 뜨거운 기대를 받은 것은 당연했다. 특히 실업의 해소를 기대하는 젊은이들이 그의 집권을 환영했다.
그러나 우파면서도 복지를 강조하는 드골주의자로서 시장과 국가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한 시라크 대통령의 우유부단함은 곧 심각한 정책 혼선으로 나타났다.
처음에 그는 세금을 늘려 그 돈으로 고용을 지원하는 정책을 펴나갔다. 고용이 늘어나는 것 같았으나 몇 달 지나지 않아 실업이 다시 증가했다. 게다가 프랑스는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따라 1999년 유로화 도입을 앞두고 국가의 적자를 줄여야 하는 유럽공동체(EC·EU의 전신)의 압력에 직면했다.
이에 그는 갑자기 긴축정책으로 돌아섰고 알랭 쥐페 총리는 적자 해소를 위해 사회보장 개혁 계획을 담은 법안을 하원에 제출했다. 법안에는 공무원 연금의 불입기간을 37.5년에서 40년으로 늘리는 계획이 들어 있었다.
○파업으로 GDP 0.25% 손실
노조와 사회당은 연금개혁에 강력히 반발했지만 쥐페 총리는 계획대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당시 찬성자와 반대자 모두 이 계획이 그토록 큰 반발과 파장을 낳을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공무원 노조는 10월 총파업을 예고했다. 이어 공무원 이후 연금개혁이 자신을 향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고 여긴 우체국 전화국 전력가스공사 철도청 등 공기업 노조가 가세했다. 연금과는 관계가 없는 대학생도 시위에 나섰다. ‘재정 적자 감소를 위한 국가의 대학 예산 지원 삭감에 항의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무엇보다 시위에 가장 큰 동력을 제공한 것은 철도 근로자였다. 이들은 연금개혁뿐 아니라 정부가 이듬해부터 시행하려 한 철도청 구조조정을 우려해 행동에 나섰다.
철도 파업으로 국가 전역의 철도망이 끊기면서 경제 활동은 큰 타격을 받았다. 전철, 버스가 다니지 않아 파리와 주변은 극도의 교통 혼잡에 시달렸다. 많은 직장인이 집을 떠나 직장 근처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시위는 파업보다 더 강력했다. 11월 24일 50만 명이 파리 등 대도시에서 시위를 벌였다. 12월 16일에는 경찰 추산 60만 명, 노조 추산 200만 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해 10월에 시작돼 3개월간 계속된 혼란은 정부가 양보하면서 12월 크리스마스 전날에야 끝났다.
1995년의 파업으로 프랑스 국내총생산(GDP)의 0.25%가 손실을 봤다. 성장률은 1994년 2.3%에서 2.1%로 후퇴했고 1996년에는 1.1%로 줄어들었다.
○한 달 만에 지지도 54%→14%로
시라크 대통령은 취임 첫해에 겪은 이 사건으로 회복할 수 없는 정치적 타격을 받고 사실상 레임덕 상태에 빠졌다. 1995년 9월까지만 해도 54%에 이르던 지지도는 10월 14%까지 떨어졌다. 프랑스 5공화국이 시작된 이래 출범 5개월 만에 이처럼 지지도가 하락한 정부는 없었다.
결국 그는 1997년 의회와 내각을 사회당에 내줬다. 2002년 대선에서 재선되기는 했지만 여론은 그의 승리라기보다는 좌파의 분열에 따른 리오넬 조스팽 사회당 후보의 패배로 평가했다. 극우파 국민전선의 장마리 르펜 후보가 조스팽 후보를 제치고 결선 투표에 올라오는 바람에 극우파를 우려한 표가 시라크 대통령에게 몰린 것도 재선에 큰 몫을 했다. 그러나 강력한 개혁을 추진할 동력은 집권 2기에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파업이 끝날 무렵인 1995년 12월 시라크 대통령은 “‘현실로부터 괴리된 것처럼 보이는 정권’이 신뢰를 얻지 못했던 것이 이런 사태를 낳았다”며 “국민의 동의 없이는 프랑스를 변화시킬 수 없다”는 반성을 내놓았다.
이후 다시 그는 개혁의 전면에 나서려 하지 않았다. ‘영국이나 독일처럼 노동시장에 유연성을 도입해 실업을 줄이라’는 요구에는 “내가 그쪽으로 한 발짝 움직이면 수백만 명이 거리로 몰려나온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비판자들은 “살아있는 사자(死者)의 전략”이라고 꼬집었다.
파리=송평인 특파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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