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FRB 새 의장에 버냉키]“그린스펀 닮은꼴이 왔다”

  • 입력 2005년 10월 26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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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24일 앨런 그린스펀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왼쪽) 후임으로 벤 버냉키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의장(가운데)을 지명했다. 부시 대통령이 그린스펀 의장과 악수하고 있다. 그린스펀 의장의 임기는 내년 1월 31일 끝난다. 워싱턴=AP 연합뉴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24일 앨런 그린스펀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왼쪽) 후임으로 벤 버냉키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의장(가운데)을 지명했다. 부시 대통령이 그린스펀 의장과 악수하고 있다. 그린스펀 의장의 임기는 내년 1월 31일 끝난다. 워싱턴=AP 연합뉴스
《‘마에스트로(거장)’ 앨런 그린스펀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후임으로 24일 벤 버냉키(51)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이 지명됐다. 백전노장인 그린스펀의 시대가 가고 버냉키 시대가 온 것이다. 내년 2월부터 미국 경제를 이끌 ‘버냉키호(號)’의 행로, 세계 금융시장에 나타나고 있는 ‘버냉키 효과’, 그리고 미 경제에 큰 업적을 남긴 그린스펀에 대해 알아본다.》

24일 미국 월가(街)는 숨을 죽인 채 백악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지난 18년간 미국의 ‘경제 대통령’ 역할을 해 온 그린스펀 FRB 의장 후임자를 오후 1시에 발표한다는 소식이 갑자기 전해졌기 때문이다.

발표를 앞두고 일부 통신에서 버냉키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의 이름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오후 1시 정각 백악관. 부시 대통령은 그린스펀 의장과 버냉키 자문위 의장이 참석한 가운데 내년 1월 말로 임기가 끝나는 그린스펀 의장의 후임에 버냉키 자문위 의장을 지명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버냉키 내정자는 이날 “상원의 인준을 받는다면 그린스펀 의장 재임 시절에 정착된 정책들과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데 최우선 순위를 둘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뉴욕 증시는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지수가 6개월 만에 가장 큰 폭의 상승세를 보였다. 시장이 예상했던 인물이 미국 경제를 이끌어 나갈 수장으로 선발돼 정책 불확실성이 제거되자 투자자들은 ‘빅 랠리(주식 활황)’로 화답했다.

증시에서 ‘버냉키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그동안 일각에서는 부시 대통령이 해리엇 마이어스 대법관 내정자 인선 때처럼 그린스펀 의장 후임자를 지명할 때 ‘깜짝 인사’를 하지 않을까 우려해 왔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이번에 안전한 선택을 했다.

그러지 않아도 시장 참여자들이 ‘그린스펀 의장 이후’를 우려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장이 불신하는 인사를 임명하면 미국은 물론 전 세계 금융시장에 충격을 줄 수 있었기 때문.

미국 중앙은행인 FRB는 연방기금 금리 조정을 통해 이자율, 주식시장, 소비, 집값, 달러화 가치는 물론이고 국가 간 자본 이동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막강한 기구다.

버냉키 내정자는 올해 6월 백악관에 들어오기 전까지 FRB 이사를 지냈고 그린스펀 현 의장과 대부분 견해를 같이해 와 일찍부터 그린스펀 의장 후임자 1순위로 꼽혀 왔다.

버냉키 내정자는 상원 인준을 받아야 하지만 이미 6월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에 오르기 전 인준 절차를 거쳤고 정치적으로 편향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인준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그는 그린스펀 의장과는 달리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장기적인 물가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어 일각에선 정책 변화 가능성도 점치고 있다.

고(高)유가 때문에 갈수록 인플레이션이 우려되고 있는 상황도 버냉키 내정자에겐 적지 않은 부담이다. 이 때문에 그가 당분간 금리 인상 기조를 유지할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하다.

인준 절차를 통과하면 버냉키 내정자는 내년 2월 미국 경제계는 물론 세계 경제계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라고 할 수 있는 FRB 의장직을 수행하게 된다. 이 때문에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그의 움직임을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뉴욕=공종식 특파원 kong@donga.com

▼美경제 지휘봉 넘겨받은 버냉키▼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내정자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학자였다.

그는 1975년 하버드대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1979년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2년 FRB 이사로 임명되기 전까지 스탠퍼드대와 프린스턴대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전공은 통화정책과 계량경제학. 그는 FRB 이사 시절 그린스펀 의장과 상당 부분 의견을 같이하면서도 디플레이션(경기침체 속에 물가가 하락하는 현상)에 직면했을 때 인플레이션 목표치를 분명히 설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 그린스펀 의장과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그린스펀 의장이 발언을 모호하게 한다면 버냉키 내정자는 ‘명백한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도 차이점. 어려운 경제현상을 일반인들에게 설명하는 데도 탁월한 능력이 있다는 평이다.

백악관 근무 시절 노란색 계통의 튀는 양말을 신고 회의에 참석했다가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서 잔소리를 들을 정도로 격식을 차리지 않는다. 그는 다음 회의 때에 튀는 양말을 몇 켤레 더 사서 부시 대통령이 참석하기 전에 다른 참석자에게 나눠서 신게 했다고 한다.

공화당원이기는 하지만 정치적 성향은 특별히 어느 정당에 경도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까지 가까운 친구들조차 그가 공화당원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정도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수재 중의 수재로 꼽혀 왔다. 초등학교 때에는 주(州)에서 주최하는 철자 맞히기 대회에서 우승을 했고, 고등학교 때에는 수학 미적분을 혼자서 익혔다고 한다.

▼18년 경제대통령 마감하는 그린스펀▼

앨런 그린스펀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취임하고 두 달이 지났을 무렵인 1987년 10월 19일 미국 뉴욕 증시가 하루 만에 20% 이상 폭락하는 ‘검은 월요일’이 닥쳤다.

당시 그린스펀 의장은 “FRB는 유동성을 공급할 태세가 돼 있다”는 단 한 문장으로 이뤄진 성명만을 발표해 시장의 불안을 잠재웠다. 그린스펀 신화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18년 동안 FRB 의장으로 재직하면서 미국 역사상 최고의 호황기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 경제는 두 차례의 소규모 경기 침체 기간을 제외하고는 줄곧 성장했다. 실업률은 떨어졌고, 사상 유례가 없는 저(低)인플레이션이 계속됐다.

취임 당시 ‘경량급’으로 평가받던 그는 특유의 예리한 판단력과 결단력을 무기로 1994년 멕시코 외환위기를 포함해 아시아 외환위기, 러시아 금융통화위기를 헤쳐 나갔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운도 작용했지만 그의 역할을 깎아내리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를 통해 FRB의 위상은 더욱 강화됐다.

특히 그는 시장의 흐름을 면밀하게 관찰한 뒤 거기에 맞는 전략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구사하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오랫동안 저금리를 유지해 미국 경제에 큰 부담이 되고 있는 부동산 거품을 초래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또 정치적인 독립성을 잘 유지해 오다가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무리한 감세정책을 지지하는 바람에 막대한 재정 적자를 초래하는 데 일정 역할을 했다는 따가운 시선도 받고 있다.

올해 79세인 그린스펀 의장은 내년 1월 31일에 퇴임한다. 이와 함께 18년간 지속된 ‘그린스펀 시대’도 막을 내릴 전망이다.

뉴욕=공종식 특파원 k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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