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권순택]경력 21년의 ‘주니어 의원’

  • 입력 2005년 8월 15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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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3대 공중파 TV 트로이카 앵커 시대의 막을 내리게 한 ABC TV의 피터 제닝스 앵커는 경험과 능력을 중시하는 미국 사회의 특징을 보여 준 사례로 삼기에 충분하다.

67세의 나이에 폐암으로 7일 타계한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한 캐나다인이었다. 1983년부터 22년 동안 줄곧 ABC TV의 저녁 메인뉴스 프로그램을 진행한 그는 20년 만인 2003년에야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그는 24년 동안 앵커로 활동하다 3월 물러난 CBS의 댄 래더(74) 씨, 지난해 12월 23년 동안의 앵커 생활을 끝낸 NBC의 톰 브로코(65) 씨와 함께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노련하고 원숙한 진행으로 미국인의 신뢰와 사랑을 받아 왔다.

학벌과 민족주의 정서가 중시되는 한국에서라면 제닝스 씨 같은 사람이 앵커를 꿈꿀 수 있었을까. 22년 동안 대통령이 3명이나 바뀌었는데도 자리를 유지하는 것도 상상할 수 없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방송사 사장이 바뀌고 앵커 인사까지 영향을 받는 나라가 아닌가.

미국 언론계에는 60, 70대의 현역이 수두룩하다. 공영방송 PBS는 72세의 짐 레러 씨가, 공영라디오 방송 NPR는 64세의 할머니 다이언 레임 씨가 핵심 프로그램을 맡고 있다. 언론인 경력이 50년이 넘는 74세의 로버트 노박 씨는 42년째 칼럼을 쓰고 있다.

싱크탱크에도 평생 한 우물을 파며 정진한 전문가들이 신진들과 공존하고 있다. 대표적인 외교 전문가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돈 오버도퍼 존스홉킨스대 교수는 1952년 대학을 졸업한 70대 노인이다. 1955년부터 38년 동안 기자 생활을 한 그는 지금도 워싱턴에서 열리는 한반도 관련 세미나에 단골로 나타난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 시절부터 백악관을 출입하며 외교정책을 다뤄 온 그의 경험과 해박한 지식에서 나오는 분석은 놀라울 뿐이다. 선출직이라도 특히 의회의 경우 경험자가 존중된다.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존 케리 상원 의원은 21년 경력의 4선 의원이다. 그런데도 그는 ‘주니어 상원의원’으로 통한다. 60, 70대 의원이 많기 때문이다. 케리 의원의 선수는 상원 외교위원회 소속 의원 18명 가운데 서열 6위에 불과하다.

미국에서는 현역 의원이 재선에 실패하는 경우가 아주 드물다. 현역에 유리한 정치자금 등 선거제도가 중요한 원인으로 꼽힌다. 낙선이 확실시되면 아예 출마하지 않는 것도 이유일 수 있다. 그러나 의원들의 철저한 자기 관리와 유권자들의 경험 존중 의식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역대 행정부의 숱한 시행착오를 훤히 알고 전문가 수준의 식견과 경험을 가진 의원들이 대부분이니 의회가 행정부를 압도할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이다.

시위 경험은 많아도 이렇다 할 경력도 없고 검증도 안 된 운동권 출신이 주류를 이루는 초선의원이 299명 가운데 186명(62%)이나 되는 한국 국회와는 너무 대조적이지 않은가. 청와대는 40대 장관으로 공직사회의 세대교체를 추진하겠다고 한다. 미국의 힘이 경험과 능력을 중시하는 풍토와 어떤 상관관계를 갖고 있는지 고민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물론 임명직인 미 행정부 고위직에는 젊은 관리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능력 때문이지 나이 때문은 아니다.

권순택 워싱턴 특파원 maypo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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