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이주 100주년]<2>한인후손의 빛과 그늘

  • 입력 2005년 1월 2일 17시 55분


코멘트
한인 3세에 해당하는 율리세스 박 씨의 집에 걸려있는 가족 사진. 두 번째 줄 왼쪽에서 네 번째.  다섯번 째가 아버지 박정균 씨와 어머니 이덕순 씨. 그들의 자손은 지금 50여명으로 늘어났다.
한인 3세에 해당하는 율리세스 박 씨의 집에 걸려있는 가족 사진. 두 번째 줄 왼쪽에서 네 번째. 다섯번 째가 아버지 박정균 씨와 어머니 이덕순 씨. 그들의 자손은 지금 50여명으로 늘어났다.
“언젠가는 내 힘으로 유카탄에서 제일 큰 공장을 만들어 운영할 거야….”

멕시코 유카탄 주 메리다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 3세 율리세스 박 씨(64)는 어린 시절부터 목표가 확실했다.

그는 지금 유카탄 주에서 유일한 자동차 매연검사소를 운영하는 지역 유지다. 현지인들조차 스스럼없이 “율리세스가 내 아버지였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로 부러움을 사고 있다.

▽율리세스 씨 집안의 성공=율리세스 씨 집안의 멕시코 정착 역사는 한국에서 옷 장사를 했던 할아버지(박승준·안토니오 박 김)가 희망과 기대 속에서 이민 길에 오르면서 시작됐다.

메리다의 집 앞에 선 율리세스 박씨. 항상 한국인이라는 긍지를 갖고 살고 있다는 그는 한인 후손들이 애니깽 작업을 했던 조상들의 생활은 물론이고, 한인 후손이라는 사실 자체를 잊고 지내는 것을 아쉬워했다.

할아버지는 애니깽(Henequen·용설란의 일종)을 잘랐고, 아버지(박정균·크레센시오 박 로페스·85)는 산에 올라가 껌의 원료인 치클액을 짜냈다.

멕시코 땅에 발을 디딘 지 4년 만인 1909년 5월 계약노동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었지만, 마땅히 다른 일거리도 없었기 때문에 다시 애니깽 농장을 기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성공의 전기가 마련된 것은 율리세스 씨가 스무 살쯤 되던 1960년대.

율리세스 씨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2학년 수준의 교육밖에 받지 못했지만 타고난 머리와 남다른 손재주를 활용해 본격적인 사업에 나섰다. 냄비 때우는 일부터 시작한 아버지는 우유저장용 알루미늄 용기 제작에 손을 댔다. 이후 현지 주민들의 반응이 좋자 아예 공장을 차려 대량생산에 나섰다. 아버지의 공장은 주방용품 제작 공장으로 커졌고, 지금도 메리다 지역에서 유일하게 알루미늄 용접 기술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탄탄한 입지를 구축했다.

▽율리세스 씨의 홀로서기=율리세스 씨는 한 걸음 더 나갔다. 형제들과 함께 10여 년간 아버지 일을 도왔던 그는 “내 자신만의 삶을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외국 상품 수입 및 건축자재, 자동차 부품 판매를 시작했다.

그는 1982년 또 한번 변신을 시도했다. 자식들에게 사업을 맡긴 뒤 멕시코시티 시청에서 농업개혁담당국장으로 일했다. 유카탄에서 알고 지내던 정부 관리가 시청으로 옮겨가면서 그를 추천했다. 그러나 자식들이 유카탄의 사업을 망치는 바람에 3년 임기의 절반만 채우고 다시 메리다로 돌아와야 했다.

기회는 다시 찾아왔다. 유카탄 주 정부가 자동차 매연검사를 의무화하자 그는 즉각 매연검사소를 설립했다. 총 4개 업체가 주 정부의 허가를 받았지만, 나머지 업체는 모두 실패했고 그가 설립한 검사소만 성공했다. 현재 그가 운영하는 매연검사소가 벌어들이는 수입은 매달 약 15만 페소(약 1400만 원). 그는 사업에 성공한 배경을 “정직하게 일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율리세스 씨가 한인의 후예임을 당당히 내세우며 지역 유지로 성공한 데는 외가의 영향도 컸다. 양반 출신인 외증조부 이종오(李鍾旿·마누엘 리·1869∼1946) 선생은 ‘샌프란시스코 대한국민회’ 메리다 지방회를 창립(1909년 5월)한 한인사회 지도자로 1917년 12월 메리다 지역을 방문한 도산 안창호(安昌浩) 선생과 함께 멕시코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다른 후예들=메리다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하며 한인 후손 뿌리찾기 운동을 벌이는 조남환 목사는 “이민 생활의 의지를 갖고 있는지 여부가 미래를 결정하는 열쇠”라고 말했다.

하지만 율리세스 씨와 몇몇 인사를 제외한 상당수는 자신이 한인의 후손인지조차 모른 채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한인 2세인 펠리페 가르시아 루고 씨(72)의 삶도 평탄치 않았다. 메리다 첸체 농장에서 농장주의 말을 관리했던 그는 평생 청소부로 일했다. 어머니는 “너의 아버지처럼 살지는 말라”고 당부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다. 27세 때부터 메리다 공항에서 16년간 청소부로 일했으며 일거리를 찾다가 조그만 어선의 주방에서 일하기도 했다. 수영도 할 줄 모르면서 4년간 어선을 탔다. 그리고 다시 청소부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메리다 외곽 지역의 한인 생활도 어렵기는 마찬가지.

율리세스 씨는 “메리다 시내에 살고 있는 한인 후예들은 부모들이 고생하면서도 어렵사리 교육을 시킨 경우가 많지만 아직도 시골에서는 농민으로 어렵게 사는 한인들이 상당수”라고 말했다.


메리다=김영식기자 spear@donga.com

▼최고령 100세 고흥룡씨 인터뷰▼

멕시코 이주 한인 역사의 산증인인 고흥룡 옹. 어머니가 남긴 성경책을 읽으며 한글을 익힌 그는 우리말로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한인 후예다.메리다=김영식 기자

“한국에는 가시밭 없죠? 여기엔 가시밭이 많아요.”

한인들이 멕시코 유카탄 메리다 농장에 도착한 지 석 달 뒤인 1905년 8월에 태어나 올해 100세인 고흥룡(高興龍·아순시온 코로나 김) 옹은 유일하게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한인 2세대.

고 옹이 기억하는 멕시코 이민 1세대는 대부분 농장 관리원의 채찍을 맞고 살았던 한(恨) 많은 삶이었다.

그는 “한인들은 농장에서 풀을 치며(애니깽을 자르며) 살았지만 잘 먹지 못해 고생했다”며 “한인들이 짚신 신고 가시밭에 풀을 치러 들어갔다가 발이 찔려 울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설명했다.

한인 1세대들이 이민 모집자들에게 속아서 멕시코로 팔려온 것을 기억하는 고 옹은 “한인들은 ‘짐생(짐승)’같이 살았다”며 “밥도 못 먹고 강냉이떡으로 끼니를 때우던 한인들은 이제 모두 죽고 나만 남았다”고 말했다.

한인 1세대가 만든 한글학교에서 주는 상을 받기 위해 열심히 한글을 배웠다는 그는 어머니가 남겨놓은 성경을 뒤적이며 한글을 공부했다.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고 옹은 그러나 “한국말이 왜 그렇게 달라졌느냐”며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고 옹의 1900년 대 초반 어법과 기자의 말투가 달랐기 때문이다.

고 옹의 집은 메리다 지역 한인사회의 상징적인 존재다. 한인 4, 5세대 젊은이들이 기초적인 한글을 배우는 곳도 고 옹의 집이다.

그는 현지에서 만난 부인 마리아 크루스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12명이나 낳았다. 멕시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자식들의 장래도 감안한 선택인 듯했다. 그는 “돼지처럼 자슥(자식)만 쑥쑥 빼서 몇 명이나 되는지도 모르겠다”며 환하게 웃었다.

spear@donga.com

▼이민자 1033명 분포▼

당시 한인 이민자의 수는 1033명이라는 게 정설이다. 하지만 기록에 따라서는 1014명에서 1036명까지 다양하다.

이 중 제물포(인천)에 주재했던 일본 영사 가토 모토시가 대륙식민합자회사에서 얻은 자료를 토대로 1904년 4월 일본 외무성에 보낸 보고서가 가장 신빙성이 높다. 그는 “1033명 가운데 남자가 702명이고 여자가 135명, 어린아이가 196명이었다”며 “독신은 196명, 나머지는 257 가족으로 구성됐다”고 기록했다.

이를 근거로 본다면 긴 항해 중 어른 2명과 어린이 1명이 사망했고, 1명이 태어났기 때문에 1031명이 메리다에 도착한 셈이다. 이들 가운데 수는 적지만 전직 관리와 양반 출신도 있었다. 이들은 한글학교를 운영하며 멕시코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대한제국 퇴직군인 200여 명이 포함됐다는 것. 군대 해산 이후 떠돌던 퇴직군인들이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민을 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남녀 성비의 불균형은 급격한 혼혈로 이어졌다. 덕성여대 이종득(李鍾得·스페인어과) 교수는 “남성 기혼자들은 멕시코로 떠날 때 아내나 딸을 데려가길 꺼린 것으로 보인다”며 “이는 계약기간을 마친 뒤 고국으로 돌아오려는 의지가 강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