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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6월 11일 19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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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를 딛고 미국 대중음악계 최고 가수로 군림했던 ‘솔의 천재’ 레이 찰스가 10일 오전 캘리포니아 베벌리힐스 자택에서 급성 간질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74세.
그는 작년 11월 엉덩이 이식수술을 받고도 “신이 부르기 전에 할 일이 있다”면서 새 앨범 작업을 계속할 정도로 음악에 열정을 보여 왔다. 새 앨범 ‘천재는 친구를 사랑한다(Genius Loves Company)’는 8월 말 발매될 예정이다.
조지아주 소도시 올버니에서 태어난 그는 녹내장을 앓아 7세 때 완전히 시력을 잃었으며 15세 때 고아가 됐다. 하지만 피아노 알토색소폰 트럼펫 클라리넷 오르간 등 악기를 익혀 가수 피아노연주가 작곡가 밴드리더 프로듀서로 활약했다. 1978년 펴낸 자서전에서 그는 “세 살 때 장난감을 갖고 놀다가도 음악소리가 나면 딱 멈춰 노래했다”고 회고했다.
그가 넘나든 장르는 팝 블루스 솔 가스펠(복음성가) 컨트리 재즈 록 펑크와 브로드웨이의 쇼 반주에 이르기까지 제한이 없었다. 특히 흑인들의 아픔이 담긴 솔 음악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미국 대중음악의 큰 기둥이 됐다. 반세기를 넘는 음악활동을 통해 그래미상을 13차례 수상했다.
그는 자신의 시각장애에 대해 “굳이 장애라고 한다면 혼자서 차를 몰고 길거리로 나가지 못한다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눈 뜬 사람처럼 하지는 못해도 내가 원하면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 그의 인생철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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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 때 본격적으로 무대에 섰으며 10년 만에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었다. ‘조지아 온 마이 마인드(Georgia on My Mind)’ ‘아이 캔트 스톱 러빙 유(I Can't Stop Loving You)’ 등 히트곡을 포함한 60장 이상의 앨범을 펴냈다. 엘비스 프레슬리, 아레타 프랭클린, 스티비 원더, 밴 모리슨, 빌리 조엘 등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20년간 헤로인에 손대다가 1960년대 중반 체포돼 1년간 요양소 생활을 하느라 음악활동을 중단하기도 했다. 그 뒤 매년 한두 장의 앨범을 펴내는 왕성한 활동을 펼쳤으며 1986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이듬해 그래미상 평생공로상을 수상했다.
두 차례 이혼하고 1952년 이후 독신으로 지내 왔으며 12명의 자녀와 25명의 손자녀 및 증손자녀를 두었다.
뉴욕=홍권희특파원 koni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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