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나바시 요이치칼럼]이라크는 善과 惡의 戰場이 아니다

  • 입력 2003년 8월 28일 18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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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M형.

이라크 바그다드 유엔사무소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무덥기로 소문난 바그다드의 8월이 정말 무섭게 느껴집니다. 앞으로 그곳에서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걱정입니다.

테러리스트들은 일련의 테러를 통해 국제사회의 공포심을 증폭시키고, 미국을 고립시키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이라크 점령을 좌절시키고, 미군을 이라크에서 철수시켜 ‘새로운 이라크 재건’ 시도를 실패로 만들겠다는 의도겠지요.

미국 내에서는 이에 대한 대처 방안으로 이라크에 주둔하는 병력 규모를 확대할 수밖에 없다는 ‘양적 해결책’에 기울어져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라크 문제가 양적 확대만으로 해결될 성격은 아닙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체제 전환 후의 안정과 부흥 △새로운 국가 건설의 청사진 △새 국가 건설에 이라크인의 참여를 보장하는 장치 △미국과 유엔의 역할 분담 등 질적인 과제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합니다. 미국 정부는 겸허하고도 진지하게 이런 문제들을 다뤄야 합니다.

‘부시의 전쟁’을 바라보는 미국 국민의 눈은 점점 차가워지고 있습니다. 저는 어느 자리에서 “미국의 이라크 점령은 옛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점령과 닮았다”는 비판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미 국무부에서 일하는 제 친구는 “베트남전쟁 때와 똑같은 상황이다. ‘체제전환론’이나 ‘민주화 도미노론’을 반복해 강조한다고 이라크와 아랍의 민주화가 이뤄지는 게 아니다. 자유선거를 실시해도 이슬람 원리주의자가 이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발언에는 강경책을 고집하는 국방부에 대한 섭섭함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35년 전 아사히신문사에 입사한 날, 호외가 발행됐던 순간이 떠오르더군요. 1968년 4월 1일 당시 편집국장이 저를 포함한 수습기자들을 국장실로 불렀습니다.

편집국장은 호외를 보여줬지요. 린든 존슨 미 대통령이 북베트남 공격을 중지시키고 베트남전에 대한 병력 추가 투입을 중단하며 자신은 차기 대통령선거 출마를 단념한다는 뉴스가 실렸습니다.

해묵은 옛날 얘기를 꺼내는 것은 그때와 지금, ‘진흙탕’의 이미지가 겹쳐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9·11테러 이후 미 공화당 행정부가 보여 온 행태를 걱정스럽게 지켜봤습니다.

우선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신의 존재’를 너무 자주 들먹입니다.

미국의 중진급 신보수주의자(네오콘)는 “유럽에는 네오콘이 생겨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럽의 보수주의는 정통성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고 말했습니다. 과거에 대한 향수에 빠져 있는 유럽의 보수와 달리 미국의 네오콘은 ‘꿈’을 말한다는 점에서 다르다는 거지요.

부시 행정부는 세계를 선과 악이 싸우는 장으로 취급합니다. 네오콘의 ‘꿈’이 신의 언어로 바뀌고, 정치가 종교적 언어로 포장되면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가장 인간에게 관대하고 인간의 마음을 울리는 행위는 종교적 자비에서 비롯됩니다. 반면 가장 인간에게 비관용적이고 잔혹하며 공포스러운 행위가 종교적 광신과 맞물릴 때 벌어진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부시 행정부의 또 다른 문제는 ‘민주주의’를 너무 자주 말한다는 겁니다. 민주주의만 하면 인간사회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주장은 민주주의를 물신화(物神化)한 논리에 불과합니다.

부시 대통령의 공화당은 ‘노스탤지어의 보수’도, ‘꿈의 보수’도 아닌, 진짜 보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중용의 도를 지켜야 한다는 얘기지요.

M형은 “할리우드 영화는 결말부가 흥미롭지만 이 전쟁은 처음 도입부가 절정”이라며 “나중에 발밑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했지요.

지금은 이라크인에 의한, 이라크인을 위한, 이라크 국가 건설의 틀을 국제사회가 함께 건설하는 것이 유일한 해법입니다. 그런 방향으로 진전된다면 ‘이라크전쟁’이라는 영화가 중간에 끝나도 괜찮을 겁니다.

후나바시 요이치 일본 아사히신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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