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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1월 25일 17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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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산 출신인 그는 17살에 일본으로 건너와 오사카(大阪)시 쓰루바시(鶴橋)역 근처의 무허가시장에서 자건거를 고치면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성실한 성격으로 주변사람들의 신뢰를 받았다. 38살의 젊은 나이인 1955년에 간사이흥은의 모체가 된 오사카 흥은을 설립할 때 많은 재일동포들이 그를 도와줬다.
흔히 재일동포 사회에서는 빠칭코, 음식점, 사채놀이를 ‘3대 사업’ 이라고 부른다. 이 전회장은 돈가진 사람만 이롭게 하는 ‘사채놀이’ 가 아니라 재일동포를 위한 건전한 금융기관을 표방했다. 오사카흥은은 재일동포가 밀집해 있다는 이점과 일본 은행으로부터 융자를 받지 못하는 재일동포들에게 집중 융자를 해줌으로써 번창했다.
이 전회장은 82년 재일동포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한국에서 신한은행을 설립했다. 신한은행이 짧은 기간에 우량은행으로 급성장한 것은 이 전회장이 경영에는 거의 간섭을 하지 않고 외풍을 막는데만 주력한 때문이라는 평가다.
그는 일본 한국상공인연합회 부회장, 한국민단 고문, 재일본 본국투자협회장 등을 지내며 모국과도 깊은 관계를 맺었다. 88올림픽 때는 재일본 한국인 올림픽후원회장으로 540억엔을 모아 한국에 전달했다. 그런 공로 등으로 국민훈장 무궁화장과 동백장, 체육훈장 청룡장등을 받았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생활을 하며 역대 한국 대통령이나 일본 정치가들과도 깊은 친분을 맺어 왔다. 고 박정희(朴正熙)대통령과는 대구사범 입학동기다.
그는 2000년 12월 간사이 흥은이 파산하자 지난해 3월 재일본 한국인신용조합협회장과 신한은행 회장 등 모든 공직을 내놓고 칩거했다. 주변 사람들에 따르면 그는 55년이나 경영을 해온 간사이흥은의 파산에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도쿄=심규선특파원 kss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