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현특파원 현지 르포]舊蘇 아프간戰 참전군 증언

  • 입력 2001년 10월 5일 18시 36분


【79년 12월 구 소련은 최정예 특수부대인 ‘알파’를 아프가니스탄에 진주시켜 탈소(탈소) 독자 노선을 고집하던 하피즐라 아민 총리를 살해하고 수도 카불을 장악한 후 친소 정권을 수립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성공적으로 보였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작전’은 곧 수렁에 빠지기 시작했다. 무자헤딘(이슬람전사)들의 저항이 시작되자 소련은 10년 동안 연인원 50만명의 대군을 투입했지만 1만3000명이 전사하고 5만여명이 부상하는 피해를 보고 89년 치욕적인 철수를 해야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에 투입된 소련군 병력 중 타지키스탄 출신은 1만5000여명. 타지크인이 아프가니스탄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주로 정보와 통역 등의 분야에 집중 배치됐다. 타지키스탄에는 아직까지 8000여명의 아프가니스탄 참전용사가 생존해있다.

▼관련기사▼

- ④북부동맹 수도 일대를 가다
- ③북부동맹 미사일무장
- ②북부동맹 "진격할날만 기다린다"
- ①한국기자로 처음 '아프간 전장'을 가다

당시 하사관으로 참전했던 알리모프 수호로프쇼 참전용사회장과 연대 정보참모였던 발리 사뵤르베코프 예비역 대위(두샨베 슬라브대 역사학 교수), 소총수였던 라흐미딘 라흐모노프 등 참전 용사들은 한결같이 “미국이 지상군을 투입하면 그 순간부터 소련군의 전철을 밟고 아프가니스탄은 제2의 베트남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소련군이 왜 실패했나〓소련군은 처음에는 특공작전으로 카불을 장악한 뒤 40군을 투입해 주요 도시와 간선도로를 장악했다. 무자헤딘과의 전투에는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을 내세우고 지원만 했다. 그러나 정부군이 패배를 거듭하자 대규모 병력을 추가 투입해 직접 무자헤딘 소탕에 나섰다. 돌이켜보면 이것은 실수였다. 지상으로 이동하는 소련군은 협곡에서 매복이나 지뢰 때문에 큰 피해를 보았다. 미국이 무자헤딘에게 이동식 스팅어 지대공미사일을 공급하면서 헬기마저도 위험해져 소련군은 곳곳에서 고립됐다.

▽전쟁 전망〓탈레반은 정면 승부를 피하고 산악지대를 근거로 끈질긴 게릴라전을 펼 것이다. 아프간 전사들은 수십㎏의 무기를 짊어지고도 산을 평지처럼 빠르게 탈 수 있다. 산악지대에서 장갑차와 탱크가 무용지물이 되면 미군이 과연 수천m 높이의 고산지대를 도보로 이동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 소련 같은 통제사회에서도 희생자가 늘어나자 반전 여론이 커져 결국 철수해야 했는데 미국이 과연 희생이 많이 나는 장기전을 치를 각오가 돼 있는지부터 살펴야 한다.

▽미군 어떻게 싸워야 하나〓먼저 공격 목표부터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아프가니스탄은 인구밀집 지역이 적어 정확하게 폭격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 주요 목표 타격 등 제한된 목적 외에는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전략이다. 지상전은 탈레반과 맞서 싸우고 있는 북부동맹군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추진해야 한다. 미군이 지상군을 파견하면 유난히 자존심과 독립심이 강한 아프간인을 자극해 더 큰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탈레반에 반대하는 세력도 ‘미군 탱크’가 아프가니스탄에 들어서는 순간 생각을 바꿔 미국에 맞서 무기를 들 수도 있다. 소련도 수십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을 지원해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군대를 파견하면서 심한 저항에 부딪혔다.

<파이자바드(아프가니스탄)·두샨베(타지키스탄)〓김기현특파원>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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