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테러 대참사]“힘의 불균형이 낳은 거대한 문명충돌”

  • 입력 2001년 9월 12일 18시 40분


미국에 대한 동시다발 테러는 단순 테러나 ‘국지전’ 차원을 넘어 인류의 미래에 심각한 의문을 던지고 있다. 지식인들은 ‘문명 공황’을 우려하고 있다. 차하순(車河淳) 서강대 명예교수, 김경원(金瓊元) 사회과학원장, 정진영(鄭璡永) 경희대 교수의 좌담 형식으로 이번 사태의 문명사적 의미와 향후 세계 흐름에 미칠 영향 등을 짚어 본다. <편집자>

▽차하순 명예교수〓먼저 이번 테러의 본질에 대해 얘기해 보자. 나는 ‘비인간화’에서 원인을 찾고자 한다. 인간이 만들어놓은 문명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자 명분 없는 대량 살상(殺傷)이라는 점에서 서양문명의 역기능이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문명의 역기능은 첫째 이성주의의 과성장에서 오는 부작용, 둘째 세계질서를 주도해 가는 미국주의의 부작용, 셋째 세계화의 부작용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번 사건이 앞으로 국제질서, 세계질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당장 예측하기는 어렵다.

▽김경원 원장〓어떤 명분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행위이자 비인간화의 극치다. 사건이 너무 참담하고 규모가 커 서양문명에 내재하는 자기모순이 폭발하면서 일어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질 수 있지만 속단해서는 안된다. 본질은 테러, 그 자체일 뿐이다.

이번 사태가 미국의 강성 외교정책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얘기도 나오지만 테러는 인간의 이성과 양심을 상실한 범죄자가 하는 행위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테러를 철학이나 사상의 또 다른 표출로 보면 테러리스트의 전략에 말려드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미국의 외교정책이 강경하든, 온건하든 상관없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인 미국이 이성과 양심을 잃은 세력들의 불만과 원한의 표적이 된 것이다.

▼테러는 이성을 상실한 범죄행위▼

▽정진영 교수〓범죄행위임에는 틀림없지만 범죄가 배태된 환경은 분석해 봐야 한다. 우선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 재편이 가져온 반발과 반항의 표출로 볼 수 있다. 국제적 민주화의 대열에서 소외되는 민족과 나라가 초강대국인 미국에 테러를 저지르는 집단이 되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세계화로부터 소외되는 집단이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채널을 찾지 못해 극단적인 방법을 생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이슬람문화와 기독교문화 사이의 오랜 갈등의 역사를 들 수 있다. 서구문명 자체의 모순이라기보다 서구문명이 세계의 보편적 가치로 세력을 확대해가는 과정에서 위기감에 빠진 세력의 극단적 반발이 표출된 것으로 봐야 한다.

▽차 교수〓과거 문명의 진척과 앞으로 나아갈 추세와도 연계시켜 보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다. 갑자기 불거져 나온 일과성 사건이라기보다는 인류 역사의 연속된 과정의 한 부분으로 파악해볼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

공산권 몰락 이후 미국이 세계질서 재편을 주도하면서 국제질서의 힘의 균형이 도리어 깨진 측면이 있다. 어차피 공식적 전쟁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비정상적인 전투행위, 즉 게릴라 행위가 일어나는 것이다. 게릴라 행위는 점점 그 규모가 커지고 있다.

▽김 원장〓말씀하신 것처럼 테러의 규모가 커지고 강도도 세지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세계가 당면한 여러 문제에 원인이 있다.

이번 사태를 세계화 과정에서의 민주주의 또는 민주성의 결핍과 연결시키는 것은 좀 무리인 듯싶다.

▽정 교수〓국제 정치경제적 측면에서 미국은 너무나도 압도적인 지위를 갖고 있고, 그들의 질서를 남에게 강요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은 소외되고 자신의 문화, 역사, 정치형태, 정치적 자율성을 유지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모든 나라와 민족들이 자율성을 보호받으면서 국제질서가 형성되는 것이 최선이지만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불리한 위치에 몰린 약소국들이 다른 방법으로 이를 해결할 길이 없는 게 문제다.

▼세계화로 약소국들 소외당해▼

▽차 교수〓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충돌에서 빚어진 사태라기보다는 자원, 경제력, 군사력의 집중에서 비롯된 불균형에서 오는 문제로 볼 수 있다. 미국의 힘이 워낙 크니까 자원과 군사력이 약한 국가나 집단이 정상적인 방법으론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킬 수 없으므로 비정상적인 방법을 사용한 것 같다.

▽정 교수〓분명한 것은 세계적으로 다른 문화권이나 문명에 비해 서구 기독교 문명과 중동 이슬람 문명의 갈등이 심하다는 것이다. 특히 이스라엘을 매개로 이 두 문명권이 충돌할 가능성이 높다. 유교권으로 분류할 수 있는 아시아의 경우만 해도 세계 경제 질서에 편입돼 큰 문제없이 살고 있는 반면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은 석유를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경제력을 바탕으로 이슬람 근본주의를 끊임없이 주장하고 있다.

▽차 교수〓이번 사태가 세계 정치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를 짚어보자.

▽정 교수〓증시 폭락 등 세계 경제가 휘청거릴 가능성이 크다. 회복중인 세계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한국에도 나쁜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또 세계화 탈냉전 시대의 안보 개념이 바뀔 것이다. 국가간 전쟁 위협보다 테러 마약 등에 대한 대책 마련이 세계적인 쟁점이 될 것이다. 미국이 세계와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될 가능성도 있다. 미국의 동맹국들은 더욱 미국 중심의 세계 재편에 동의할 것이다.

▽김 원장〓미국이나 미국민 입장에선 테러에 대해 보복하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 것이다. 특히 테러 집단이나 배후 인물을 보호하고 있다고 확인된 나라에 대해서는 무력행사의 충동을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낳는다. 보복 충동을 자제하고 테러 행동을 한 세력을 ‘처벌’하는 차원에서 대처해야 한다. 미국의 양식(良識)과 지성에 기대를 걸어본다.

▽차 교수〓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즉각 세계적인 반(反)테러기구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3차 대전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는데 지나친 우려로 본다. 테러를 자행한 국가나 집단에 대한 국지적 보복은 대규모의 전쟁을 일으킬 수 있어 미국민이 원하지 않을 것이다. 또 제1,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상황에 비교해도 제3차 대전이 일어날 정도로 불가피한 상황은 아니다.

▼3차대전 발발 가능성 적어▼

▽정 교수〓국제적인 차원에서 테러가 발을 붙일 수 없도록 대책을 세우는 노력이 가시화된다면 이번 사건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부시 정권도 국민의 지지를 받고 싶어할 것이다. 부시 정권의 성숙도를 평가하는 시험대다.

▽차 교수〓세계 정치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바뀌었으면 좋겠다. 미국이 너무 독보적으로 무대를 장악하는데 제동을 걸 나라가 없다. 미국이 차지하는 역할이 너무 크다. 그럴수록 미국은 점잖게 행동해야 한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무는 상황이 언제든지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김 원장〓테러는 강한 자가 택하는 것이 아니다. 약자의 최후 수단이다. 어쨌거나 이번 사건은 미국의 정보체계의 실패(Intelligence failure)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그러나 테러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자유를 제한하는 사태는 없어야 한다.

▽정 교수〓민주당의 반대에도 아랑곳없이 부시 행정부는 미사일방어(MD) 체제 구축을 강력하게 추진해왔다. 이번 테러를 통해 단기적으로는 MD 정책이 미국 안팎에서 힘을 얻게 될 것으로 보인다.

▽김 원장〓상업용 비행기를 이용해 미국 내부에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MD가 구축돼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 교수〓미국의 대외정책이 취약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강화해나가는 것과 불만과 불평등의 목소리를 받아들여 여러 국가들과 공존할 수 있는 국제질서를 모색하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부시 정부는 강경노선을 걸어왔고 현단계에서는 후자를 택할 가능성이 적어 보인다.

▽차 교수〓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등 여러 사례를 통해 미국의 정보망이 겉으로는 과학적이고 체계적이지만 실제는 취약한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은 대통령과 고위 공직자에 대한 문책보다는 내부 결속과 시스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김 원장〓미국은 분위기 조성 차원이 아닌 관계 개선 차원에서 북한에 대해 ‘실질적인 내용’을 요구해 왔다. 최근 북한이 우리와 대화를 재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은 북한 권력층 내부의 입장 정리가 완료됐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 북-미관계가 어려워지면서 한국으로부터의 실질적인 경제지원만이라도 유지하겠다는 필요성을 느낀 것이라고도 분석할 수 있다. 미국이 여전히 북한을 테러국가로 분류하고 있기 때문에 북-미관계가 이번 사태로 영향을 받게 될 가능성은 있지만 모든 것은 전적으로 북한의 태도에 달려 있다고 봐야 한다.

<정리〓정경준·이호갑·차지완기자>news91@donga.com

◇차하순 약력 △1929년 출생 △서울대 사학과 졸 △미국 브랜다이스대 졸 △서강대 사학과 교수 △국제역사학 한국위원장 △현 서강대 명예교수

◇김경원;△1936년 출생 △서울대 법대 중퇴, 미국 윌리엄스대 졸 △미국 하버드대 정치학박사 △고려대 정경대 교수 △주유엔, 주미 대사 △현 사회과학원장, 고려대국제대학원 석좌교수

◇정진영; △1957년 출생 △서울대 정치학과 졸 △켄트주립대 정치학석사 △미국 일리노이대 정치학박사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현 경희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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