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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4월 26일 18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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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26일 오후 발표 직전까지도 외무 재무 문부과학 경제산업 법무상 등 주요 각료의 이름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일본 TV들은 내정된 각료의 이름이 한명씩 알려질 때마다 ‘조각(組閣) 정보’라는 자막뉴스를 내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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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 총리는 공약대로 파벌을 무시하고 조각을 했다. ‘괴짜’라는 별명답게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거부할 경우에는 제2, 제3의 후보에게 입각을 타진했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그는 간사장 정조회장 총무회장 등 당 3역도 혼자서 결정했으며 각료 인선을 할 때는 국회의원 숙소에 틀어박혀 각료 후보에게 열심히 전화를 걸었다는 것.
당원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총리가 된 그는 ‘직선 총리’ ‘대통령형 총리’라고 불리고 있다. 그는 인사에서도 강력한 권한을 유감 없이 발휘한 셈이다.
이번 인사의 또 다른 특징은 공약대로 여성각료가 대폭 늘어난 것. 5명이나 입각해 전후 최대를 기록했다. 다나카 마키코(田中眞紀子) 의원의 외상 기용은 이번 조각의 하이라이트라고도 할 수 있다. 이밖에 여성각료는 유임된 오기 지카게(扇千景) 국토교통상과 가와구치 요리코(川口順子) 환경상, 새로 기용된 모리야마 마유미(森山眞弓) 법무상 및 도야마 아쓰코(遠山敦子) 문부상이 있다.
그러나 ‘탈파벌’ 선언에도 불구하고 고이즈미 총리는 친정인 모리(森)파 소속 인물을 어쩔 수 없이 많이 기용했다. 모리파의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관방장관과 3명의 관방부장관 모두가 유임됐다.
모리파는 가장 많은 3명이 기용됐다. 이 부분은 앞으로 논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당내 최대 파벌인 하시모토(橋本)파에서는 무라이 진(村井仁) 국가공안위원장과 유임된 총무상 등 2명만을 기용했다. 하시모토파는 각료 인선을 할 때 아무런 희망사항을 얘기하지 않았다. 하시모토파는 7월의 참의원선거 때까지는 협조하겠지만 그 후에는 다른 비주류와 함께 고이즈미 체제를 흔들기 위해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도쿄〓심규선특파원>ksshim@donga.com
고이즈미 총리 내각 | |||
| 직 책 | 이 름 | 나 이 | 주요경력 |
| 총 리 | 고이즈미 준이치로 | 59 | 후생상 우정상 |
| 총 무 상 | 가타야마 도라노스케 | 65 | 참의원 국회대책위원장(유임) |
| 법 무 상 | 모리야마 마유미(여) | 73 | 관방장관 문부상 |
| 외 무 상 | 다나카 마키코(여) | 57 | 과학기술청장관 |
| 재 무 상 | 시오카와 마사주로 | 79 | 운수상 문부상 자치상 |
| 문부과학상 | 도야마 아쓰코(여) | 62 | 문화청장관(민간인) |
| 후생노동상 | 사카구치 지카라 | 67 | 공명당정조회장,부대표(유임) |
| 농림수산상 | 다카베 쓰토무 | 60 | 오키나와개발차관 운수차관 |
| 경제산업상 | 히라누마 다케오 | 62 | 운수상 통산상(유임) |
| 국토교통상 | 오기 지카게(여) | 67 | 보수당 대표(유임) |
| 환경상 | 가와구치 요리코(여) | 60 | 산토리상무(유임―민간인) |
| 관방장관 | 후쿠다 야스오 | 64 | 외무성정무차관(유임) |
| 국가공안위원장(방재) | 무라이 진 | 64 | 대장차관 금융재생차관 |
| 방위청장관 | 나카타니 겐 | 43 | 우정차관 자치차관 |
| 금융특명상 | 야나기사와 하쿠오 | 65 | 금융재생위원장(유임) |
| 경제재정상 | 다케나카 헤이조 | 50 | 게이오대 교수(민간인) |
| 행정개혁상 | 이시하라 노부테루 | 44 | 통산차관 |
| 과학기술상 | 오미 고지 | 68 | 대장차관, 경제기획청장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