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한-일수교 개입]'청구권 4억-무상 3억달러' 제의

  • 입력 2000년 8월 21일 06시 59분


아사히신문이 입수한 미국 측 자료는 1940년대 후반부터 한일 양국이 기본조약을 정식조인한 직후인 66년까지의 것으로 전문 회의록 내부보고서 등 모두 수백 쪽에 이른다.

이종원(李鍾元·국제정치학) 릿쿄(立敎)대교수는 “일본은 기본조약을 준비할 당시 어떻게 하면 한국민이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약했다”며 “일본은 미국의 공식개입에는 저항감을 느꼈지만 한국과의 신뢰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미국에 의존했다”고 말했다.

▽일본에 대한 사죄 촉구〓64년 6월 주일 미국대사관 직원 2명과 마에다 도시카즈(前田利一) 일본 외무성 북동아시아과장이 만났다. 이들은 ‘어떻게 하면 한국에서 일본의 이미지가 좋아질 것인가’에 대해 논의했다. 미국 측은 한국학생에 대한 장학금 지급, 정 재계 대표단의 한국방문, 수입규제완화 등을 제시하고 “한국인은 일본인이 식민지 시대에 행한 여러 가지 범죄에 대해 사죄하기를 바라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마에다 과장은 “일본 정부가 식민지 지배 행위에 대해 사죄성명을 내는 것은 상당히 민감하고 어려운 문제”라고 대답했다.

에드윈 라이샤워 주일 미국 대사는 64년 11월 한국에 대한 사과에 부정적인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외상과 만나 “일본의 도량이 크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는 가장 유효한 방법은 식민지 과거에 대한 사죄”라고 충고했다. 시나 외상은 65년 2월 한국을 방문해 일본 정부로서는 처음으로 “양국의 긴 역사 중에서 불행한 시기가 있었던 것은 정말로 유감이며 깊이 반성한다”고 사죄했다.

▽청구권 금액의 제시〓한국과 일본은 협상과정에서 청구권 액수를 서로 비밀로 했지만 미국 측에는 알려줬다. 62년 3월 미 국무부가 한일 양국에 특사로 파견한 해리먼 극동담당차관보는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일본 총리와 만나 “한국정부가 수용할 수 있는 청구권 금액과 한국인이 요구하고 있는 금액의 중간, 즉 4억달러라면 합의에 이를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같은 해 9월 딘 러스크 미 국무장관은 뉴욕에서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외상과 만나 무상공여액수에 대해 “일본이 좀더 액수를 올려 3억달러로 하면 결론이 날지 모른다”고 말했다. 2개월 후 오히라 외상은 일본을 방문한 김종필(金鍾泌)중앙정보부장과 소위 ‘김―오히라 메모’를 교환하고 ‘무상 3억달러’를 수용했다.

▽미국 존재 숨기기〓오히라 외상은 64년 1월 도쿄(東京)의 오쿠라호텔에서 러스크 미 국무장관과 만나 “일본정부는 조약체결 준비가 되어 있다”며 이를 한국정부에 전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기자회견에서는 어디까지나 순수하게 한일 두 나라의 관계라는 점을 강조해 달라”고 부탁했다.

▽미국의 개입배경〓62년 4월 미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존 F 케네디 대통령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한일 회담과 관련, “우리들의 이해관계는 조기종결에 달려있다. 조기종결되면 일본은 한국에 대한 자금원조라는 무거운 짐을 (미국과) 함께 질 수 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미국이 한일 양국에 협상을 빨리 끝내라고 촉구할 때는 베트남 북부에 폭격을 개시하는 등 냉전이 확산될 때였다. 65년 2월 김정렬(金貞烈)주미대사는 번디 미 국무부 극동담당차관보에게 “한국이 베트남전쟁의 후방지원을 맡았다는 점을 들어 박정희대통령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할 수는 없겠느냐”고 물었고 번디는 “훌륭한 생각”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도쿄〓심규선특파원>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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