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총통선거 주요3후보 비교]국민당 재집권 장담못해

  • 입력 2000년 3월 9일 19시 47분


▼국민당 롄잔▼

집권 국민당 후보인 롄잔(連戰·64)은 매사 조심스러운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는 그의 가장 큰 강점이자 단점이다.

쑹추위(宋楚瑜)와 천수이볜(陳水扁)처럼 열렬한 지지자는 많지 않다. 그만큼 그를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 또한 적다. 다른 후보에 비해 적이 많지 않다는 점이 강점이다. 한편으로 이같은 미적지근한 이미지 때문에 유권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중국 산시(陜西)성 시안(西安)에서 태어나 열 살까지 중국 본토에서 자랐다. 원적은 대만에 두고 있다.

미국 유학을 거쳐 대만대 교수로 있다 1975년 엘살바도르 주재 대사로 부임하면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행정원 부원장(부총리에 해당)과 외교부장을 거쳐 대만성장을 지냈다. 93년 행정원장(총리)에 올랐다. 96년 총통을 직접선거로 처음 선출하던 당시 리덩후이(李登輝)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해 부총통이 됐다. 대중국 정책을 비롯해 리총통 노선의 충실한 추종자다. 조부는 저명한 역사학자로 대만통사를 저술했으며 부친은 재정부장(장관)을 지낸 명문가 태생이다.

수백억위안(元)의 재산을 가진 손꼽히는 대만 재력가 중 한 사람이다. 미스 차이나 출신의 부인 팡위(方瑀)와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고 있다.

▼민진당 천수이볜▼

민진당 후보 천수이볜(陳水扁·49)은 세 후보 중 가장 젊고 경력도 화려하다.

그가 차세대 지도자로 떠오른 것은 1994년. 당시 수도 타이베이(臺北) 시장 직접선거에서 그는 야당 후보로는 처음으로 승리, 돌풍을 일으켰다. 지난해 아시아위크가 선정한 ‘차세대 아시아 정치인 20명’에 들었으며 1994년에는 미 타임지 선정 ‘21세기 젊은 지도자 100명’에 포함됐다.

대만 남부 타이난(臺南)에서 사탕수수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만대 법대 3학년때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수재다. 1979년 가오슝(高雄)에서 계엄해제를 요구하며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을 때 그는 시위주동자에 대한 변론을 자청, 이름을 얻었다. 86년에는 국민당의 일당독재에 반대하는 글을 잡지에 기고했다가 8개월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그는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이란 점을 강조하면서 명문가 출신 롄잔(連戰)을 겨냥해 “거만한 부잣집 아들이 보통사람의 고통을 어떻게 알겠느냐”며 서민층을 파고들고 있다. 지난해 그는 대의원 391명의 전원 일치로 민진당 후보로 확정됐다.

그는 85년 부인 위수전(禹淑珍)이 트럭에 치여 두 다리를 잃자 정치적 테러라고 주장해 관심을 모았다. 자녀는 1남 1녀.

▼무소속 쑹추위▼

무소속 후보 쑹추위(宋楚瑜·58)는 당과 지역연고를 떠나 가장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탄탄한 사조직에 힘입어 1993년 최초로 실시된 대만성장(臺灣省長) 직선에서 승리를 거두며 국민당 2인자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당내 세력싸움에서 져 후보 지명을 받지 못하자 지난해 11월 탈당, 무소속후보로 나섰다. 개혁적인 이미지로 한때 40%대의 지지율을 보이며 ‘쑹추위 신드롬’을 일으켰다. 그러나 지난해 말 국민당이 폭로한 거액의 비자금 조성의혹 때문에 지지율은 20%대로 내려앉았다.

중국 후난(湖南)성 출신으로 후보 중 유일하게 본토에 원적을 두고 있다. 중국정부가 세 후보 중 가장 매력을 느끼고 있는 후보다. 대중국관계를 고려할 때 그가 가장 적합한 후보라고 여기는 대만인이 상당수다. 국민당에 대해서는 ‘부패’,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는 민진당에 대해서는 ‘급진’이란 평가를 내리는 대만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1989년부터 5년간 국민당 당비서장(사무총장에 해당)을 지낼 만큼 오랫동안 국민당에 몸담아왔다. 그러나 국민당과 결별한 다음 그는 유세 때마다 “내 평생 가장 후회스러운 일은 국민당에 몸담은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부인 천완수이(陳萬水)사이에 1남1녀.

<강수진기자>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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