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람선대학 세계여행/모로코]사람사는 모습은 같아

  • 입력 1997년 10월 7일 07시 56분


우리들의 마지막 여행지는 모로코였다. 모로코는 알제리 튀니지와 함께 북아프리카의 마그레브 3국을 이루고 있는 나라. 일찍이 아랍의 정복자들에게는 「미지의 서쪽」이었다. 우리나라와는 정반대편에 있고, 그래서 우리에게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나라. 영화 「카사블랑카」나 「망향」속의 멋진 장면들을 떠올리면서 「아!그 나라…」 하고 고개를 끄덕거릴 올드 영화팬은 있을지 모르지만…. 소중한 추억들을 하나씩 정리하며 오른 마지막 여행길은 정들었던 사람들과의 헤어짐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분위기가 매우 무거웠다. 그러면서도 배 안의 스케줄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모로코 여행을 마치고 나면 치르게 될 기말고사 시간표가 발표됐고 또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준비를 위해 기독학생모임에서는 캐럴연습이 한창이었다. 우리가 밟은 모로코 왕국의 첫 땅은 카사블랑카. 「하얀 집」이라는 뜻의 카사블랑카는 모로코 최대의 도시로 15세기 포르투갈인들이 건설했다. 1943년 영국의 처칠 총리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등이 회담을 가졌던 곳으로 유명한 안파호텔이 있었던 고급주택가 안파힐, 폴리네시아의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해변휴양지 타히티 해수욕장이 카사블랑카의 명소. 당초 모로코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게 낙타와 지프를 타고 사하라사막을 누비는 것. 그러나 카사블랑카의 낭만이 결국 이 계획을 수정하게 했다. 첫날 카사블랑카의 다운타운을 활보하면서 느낀 것은 대륙과 나라, 도시의 다름과 상관없이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어디서나 똑같다는 사실이었다. 다음날 기차를 타고 달려간 곳은 모로코 왕국의 수도 라바트. 국왕이 사는 왕궁과 함께 카르타고와 로마시대의 유적, 아프리카 사람들이 옛날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민속촌 등을 둘러보았다. 라바트에서 다시 카사블랑카로 돌아가기 전 잠시 짬을 내 그곳의 시장들을 둘러보았다. 서울의 남대문시장을 연상케 하는 커다란 시장에서 아이쇼핑에 열을 내다 하마터면 기차시간을 놓칠 뻔했다. 여러가지 신기한 상품중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정육점 진열장에 가득 놓여진 돼지고기. 우리의 소주 안주인 머리고기와 족발과 생김새가 비슷했다. 전통음식점에서 주문한 쇠고기요리도 우리나라에서 먹던 갈비와 맛과 모양이 거의 똑같았다. 구우면서 먹는 게 아니라 구워져 나온 것을 먹는다는 것만 다를 뿐. 거리에서 발목을 잡은 것은 낡고 허름한 전통의상을 입은 춤꾼들의 공연과 곳곳에서 진을 친 약장수들. 뱀쇼 원숭이쇼 등을 보여주면서 하얀 알약들을 마치 만병통치약이나 되는 것처럼 선전하며 신바람나게 목청을 돋우고 있는 게 볼 만한 구경거리였다. 왼쪽 엄지발가락이 생살을 앓아 큰 고생을 한 적도 있었다. 결국 발톱을 잘라내는 수술을 했는데 그러면서 수술을 해준 일반외과교수인 나이트박사와 친해졌다. 하루는 그로부터 결혼이야기를 듣게 됐다. 고등학교만 나온 평범한 집의 딸과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고 신혼여행으로 1년간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는 것이었다. 의사와 고졸여자와의 결혼, 1년동안의 여행, 두가지 모두 흥미로운 일이었다. 유람선 대학의 학장인 댄의 사랑이야기도 들을 만했다. 중학교때까지 록가수가 꿈이었다는 그는 학창시절 마약밀매를 하며 용돈을 만들어 쓴 「불량학생」. 그러나 선교사의 딸인 카렌을 만나 결혼에 골인하면서 완전히 달라진 삶을 살게 됐다. 록가수에 대한 꿈을 버린 그는 신학교 과정을 밟았고 아마존강 유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그리고 틈틈이 언어학을 공부, 이제는 알아주는 언어학자가 됐다. 모로코를 떠나기 전날 잔과 테드라는 두 친구가 짐을 싸서 배에서 내렸다. 이왕에 아프리카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고 아프리카 여행을 계속해야 한다는 게 그 이유. 일정을 끝내지 않으면 그때까지 딴 학점 모두를 잃게 되는데도 맘 먹은대로 「결행」하는 것을 보고 역시 젊음은 당돌하고 무모할 때 더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문형진씨 참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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