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망을 위해 거침없이 남자를 이용하는 팜므파탈, 가슴에 불꽃을 품은 과학자, 고통을 붓으로 찍어내는 화가…. 너무나 다른 색채를 지닌 캐릭터를 자유자재로 연기한다. 폭발하는 고음은 물론 애절하게 속삭이고, 마침내 무너지며 절규하는 넘버까지 매끄럽게 소화한다. 배우 김소향(45)이다.
서울 강남구 광림아트센터에서 그를 4일 만났다. 그는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내년 1월 11일까지 공연되는 뮤지컬 ‘에비타’에서 에바 페론(1919~1952)을 연기하고 있다. 김소현, 유리아 배우와 번갈아가며 무대에 선다. 그는 “에비타 역을 맡은 셋 중 가장 눈물이 많다. 제작진이 (병으로 쇠약해진 에비타가 타는) 휠체어에 저를 위해 손수건을 따로 달아줬다”며 웃었다.
‘에비타’는 1978년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첫 선을 보였다. 국내에서는 2006년 초연됐고 2011년 두 번째 공연 후 이번이 세 번째 무대다.
배우 김소향은 앙상블에서 시작해 오랜 시간 한 계단씩 올라 주연을 맡게 됐다. 그는 “가진 게 없기 때문에 무조건 노력해서 채워야 한다”며 웃었다. EMK엔터테인먼트 제공
시골에서 가난한 사생아로 태어났지만 남자를 이용해 원하는 바를 이루고 끝내 아르헨티나의 영부인이 된 에바 페론의 삶을 강렬하게 그렸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면모를 입체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정점에 올랐지만 암으로 짧은 생을 마감하기에 감정의 진폭도 크다. 해설자 역을 하는 가상의 인물 ‘체’(마이클 리, 한지상, 민우혁, 김성식)가 함께 하지만 에바 페론이 사실상 단독으로 무대를 이끈다.
노래로 극을 이끌어가는 작품이어서 노래의 힘이 크다. ‘오페라의 유령’, ‘캣츠’ 등을 만든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작곡했다. 후안 페론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에바 페론이 부른 유명곡 ‘Don‘t Cry for Me Argentina’는 뜨겁고 절절하다.
“화내거나 울려고 하지 않아도 노래를 부르면 자연스레 감정이 나와요. 불협음이 많고 한 음 한 음마다 에비타의 삶과 감정을 압축적으로 담아 난도가 높아요. 등에서 땀이 날 정도라니까요. 그래도 ‘10년 동안 ‘에비타’ 계속 할래?‘라고 물으면 곧바로 ‘네!’라고 할 정도로 좋아요.(웃음)”
그는 에바 페론을 연기하는 게 꿈 같다고 했다.
“2006년 국내 초연 때 후안 페론의 정부 역을 했어요. 그랬던 제가 에비타로 무대에 서다니 너무 벅차요. 무시당하던 사생아에서 영부인이 된 에비타의 삶은 앙상블로 시작해 주연을 맡게 된 저와 비슷하게 느껴져요. 뭔가에 꽂히면 아무리 말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경주마처럼 달려가는 것도요. 최고의 자리에 가려 했던 에비타의 심정이 너무나 이해돼요. 팜므파탈의 면모는 제 능력 밖이지만요.(웃음)”
뮤지컬 ‘에비타’에서 영부인이 돼 벅찬 심정으로 국민 앞에 선 에바 페론을 연기하는 김소향(오른쪽). 왼쪽은 후안 페론 역을 맡은 윤형렬. 블루스테이지 제공 그는 국민대 연극영화과에 재학 중이던 2001년 뮤지컬 ‘가스펠’의 소냐 역으로 데뷔했다. 여러 작품에서 커버 역을 하다 2011년 미국으로 건너 가 뉴욕필름아카데미에서 연기 공부를 했다. 미국에서 ‘왕과 나’, ‘올리버’, ‘미스 사이공’의 앙상블 겸 조연을 했다. 한국에서 ‘보이첵’, ‘마타하리’의 주연을 맡은 뒤 다시 미국으로 갔다. 2017년 ‘시스터 액트’의 인터내셔널 투어에서 막내 수녀 메리 로버트를 연기한 후 완전히 귀국해 ‘마리 퀴리’, ‘프리다’, ‘마리 앙투아네트’ 등에서 주연을 맡았다.
스포트라이트를 받기까지 힘든 시간이 많았다.
“커버 역을 오래 하며 조바심이 나고 지치기도 했어요.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미국에 갔지만 언어도 낯설고 돈도 없는 이방인으로 사는 게 만만치 않았어요. 현지 오디션에서 150번 넘게 떨어졌어요. 아휴, 말이 150번이지 얼마나 진이 빠졌는지 몰라요. 오디션을 통과했는데 비자 문제로 무대에 못 선 적도 있고요. 설움을 얘기하자면 2박 3일로는 부족해요.(웃음)”
그의 이름 앞에는 ‘믿고 보는 배우’라는 표현이 자연스레 붙는다. 그는 에바 페론을 비롯해 마리 퀴리, 프리다 칼로, 마리 앙투아네트 등 실존 인물을 그린 작품에 많이 출연했다.
“여성의 성장을 그린 작품이 좋아요. 완성된 캐릭터보다 변화하며 성장하는 과정을 표현하는 게 즐겁거든요. 어떤 고난이 있었고 그 끝에는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 보여주는 건 짜릿해요.”
실존 인물은 좀 더 예민하게 분석하고 표현한다.
“공감가게 연기하되 일방적으로 미화시키진 않아요. 왜곡하면 안 되니까요. 판단은 관객에게 맡깁니다. ‘에비타’에서도 야망을 이루려는 에비타의 노력을 인정해요. 그 방법엔 동의하기 어렵지만요. 에비타에 대해선 성녀와 악녀로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지만 둘 다 아니라고 봐요. 인간은 양면적인 존재잖아요. 에비타의 빛과 그림자를 사실적으로 보여주려 해요.”
‘뮤지컬’ 에비타에서 김소향(가운데)은 원하는 것을 향해 거침 없이 나아가는 에비타를 맞춤으로 연기한다. 블루스테이지 제공그는 스스로를 ‘노력파’라고 했다.
“지금도 부족한 게 많아요. 에비타 연기를 위해 보컬 코칭을 받았어요. 모자란 부분을 계속 채워나가는 게 인생의 숙제예요.”
마음먹은 게 있으면 성에 찰 때까지 해야 직성이 풀린다.
“하나에 꽂히면 끝을 봐야 해요. 미국에서 무대에 서려고 애쓴 것도 유학만 해선 안 되고 ‘무 하나를 자르고’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는 몰입도 높은 연기 비결로 경험을 꼽았다.
“여행, 연애 등 직접 해보고 느낀 게 도움이 돼요. 낯선 곳에서 기차를 놓쳐 발을 동동 구르고, 소매치기를 당해 현지 경찰서를 찾아가는 등 예상치 못한 일이 닥치고 그걸 수습하는 과정 모두가 자산이 되거든요.”
그는 한 해에 3, 4작품에 출연한다. 어떻게 이렇게 쉼 없이 달릴 수 있을까.
“제 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작품 사이사이 쉬는 기간이 꽤 있어요.(웃음) 올해도 3, 4월엔 쉬었어요. 시간 날 때면 테니스를 하고 강아지 ‘왕자’랑 산책을 다녀요. 공상하는 걸 좋아해서 카페에서 노트에 낙서도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요.”
글을 쓰고 연출하는 상상도 한다.
“콘서트를 위해 모놀로그를 쓰면서 글쓰기에 매력을 느꼈어요. 여성이 주인공인 1인극이나 2인극을 써보고 싶어요.”
이젠 스스로를 조금은 풀어주려고 한다.
“2년 전만해도 공연 전에 요가, 물구나무 서기, 객석 뛰어다니며 몸 풀기 등 루틴에 엄청 집착했어요. 안 지키면 큰일난다고 여겼죠. 그런데 배우는 좀 더 자유로운 영혼이 돼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은 후배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몸을 풀어요.”
지독할 정도로 성실한 그의 노력은 무대에서 고스란히 피어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김소향은 쉽게 가라앉을 배우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넘치는 평가에 참 감사해요. 계속 새로운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할 거예요. 어떤 역을 맡아도 다른 이와 비슷하지 않게 저만의 세계를 만들어 표현하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