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인생 2막] 심리학자가 말하는 인생 2막의 행복
서은국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
서양은 60대에도 행복감 높아… 타인 시선 의식하면 행복 어려워
한국의 행복도 세계 58위에 불과… 사회적 신뢰와 타인 배려 부족 탓
2021년 초 ‘서영아의 100세 카페’ 시리즈를 시작하며 노후에 꼭 필요한 것으로 ‘돈 건강 행복’의 3가지를 꼽았다. 이중 가장 까다롭고 미완의 숙제로 남은 것이 ‘행복’인 듯하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나이가 들면 행복의 요건도 변하는 걸까. 9월 25일 국내에서 행복 심리학 분야를 개척한 서은국(59)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를 만나 지혜를 구해봤다.
서 교수는 철학 영역에서 다뤄지던 행복이란 주제를 과학적, 생물학적으로 접근해 그 본질을 탐구해왔다. 2014년 펴낸 대중서 ‘행복의 기원(21세기북스)’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20만 부 이상 팔렸다고 한다. 지난해 출간 10주년을 기념해 개정 증보판을 내기도 했다.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자신의 연구실에서의 서은국 교수. 국내에서 행복심리학 붐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학교에서 자택이 있는 인천 송도까지 2시간씩 운전해야 하지만 그 시간을 즐긴다고 한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행복은 강도보다 빈도가 중요하다”
―행복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며 생존을 위한 뇌의 작동이라고 하십니다. 외향적인 사람이 행복에 유리하다는 얘기인데.
“행복은 진화적으로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상황일 때 느끼도록 설계된 감정입니다. 행복에 영향을 주는 성격적, 기질적, 사회적 요인을 연구해보면 외향적인 사람들이 유리한 것으로 나와요. 행복이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생기는데, 많이 움직이고 많이 만나며 뇌의 보상체계가 더 활발하게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노후가 길어지고 있습니다. 병들고 삐걱거리는 몸을 데리고 오랜 세월 살아야 하는데요.
“행복의 본질은 본인이 즐거움 같은 긍정적인 정서를 자주 느끼고 삶에 만족하는 경험을 하는 겁니다. 이건 20대건 70대건 똑같다고 봅니다. 다만 그런 경험을 유발시키는 일상의 사건들은 바뀌겠죠.”
“부모님이 미국에서 살다 최근 돌아오셨는데 매주 뵈러 가서 느끼는 게 연세가 들더라도 행복의 요인은 풍성한 사회적 경험이라는 거예요. 그 부분에서 결핍이 있으면 고립감이 생길 수 있죠. 예컨대 90세가 목전인 아버지가 운전을 기피하게 됐는데 동선이 좁아져 답답해하십니다. 행복의 동선도 좁아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해외 통계는 60대부터 행복감 높아져
“다만 해외 각국 데이터를 모아보면 연령과 행복은 관계가 거의 없어요. 오히려 서양연구들에서는 행복감이 중년에 살짝 떨어졌다가 퇴직 후 올라가는 유(U)자 커브가 나오죠. 그런데 한국은 60~70대를 지나면서 특히 남성분들이 조금 내려가는 경향이 있어요. 이분들이 사회적 활동에서 물러나는 시기와 겹치죠.”
영국 통계청이 발표한 2014년 연령대별 인생만족도 조사결과. 영국인들은 20대에 최고조를 기록한 뒤 50대 후반까지 내리막길을 걷다가 60세를 기점으로 우상향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여준다.그는 이를 집짓기에 비유했다.
“저는 한국인들이 인생에서 두 개의 집을 짓는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직장이나 사회생활 등 세상의 인정을 받기 위한 집이죠. 일하고 경력 쌓아나가고, 공적인 치적이 쌓이는 집입니다. 또 하나는 개인적 즐거움과 사적 경험으로 꾸려나가는, 프라이빗한 집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내가 중요하게 여기고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바깥 집은 점차 쓸모가 줄어들죠. 퇴직이나 은퇴가 대표적인 이벤트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위해 만든 집이 거의 전부로 여겨지는 사회가 있어요. 그 비중이 큰 사회일수록 바깥 집에서 나와 나의 집으로 이사할 때 심리적 여파가 클 수밖에 없죠. 한국이나 일본, 싱가포르가 그런 사회인 것 같습니다.”
이런 현상은 사회를 둘러싼 문화의 탓이 크다고 한다.
“이 나라들의 공통점은 타인의 평가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회라는 거예요. 이런 사회에서는 공적인 면에 속한 무대가 끝나고 다음 무대로 갔을 때 허전하죠. 게다가 이런 사회일수록물질적인 것뿐 아니라 사회적인 자원도 축소된다는 게 결정타입니다. 내가 평생 만나고 투자했던 인간관계 대부분이 업무 관련인데, 아무리 친해도 비즈니스적인 관계잖아요. 인생에서 비즈니스 부분이 끝나면 그 사람들이 싹 사라지는 거고요. 여러가지 상실감을 만들겠죠.”
친구가 많은 노인이 자신과 가족, 자식에게도 바람직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삶을 회사나 일에 쏟아부었던 입장에서는 막막해지죠. 내가 뭘 좋아하는지 고민하거나 준비할 여유가 없었잖아요. 예전보다 축소된 삶을 살게 되고 경제나 건강, 이런 이슈들까지 겹치면 행복에 영향을 받겠지요.
그러니까 미리 준비를 해야죠. 흔히 노후라고 하면 돈이나 건강만 생각하는데, 사회적으로 풍족한 자원을 확보하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한국처럼 집단주의적이고 유교적인 사회에서는 사람에 대한 에너지를 가족이나 회사 등 아주 협소한 집단에 ‘올인’하면서 살잖아요. 울타리밖 사람과의 연결망을 구축하는데 관심이 덜하죠. 한창일 때는 모르지만 인생 2막, 노년으로 들어가면 그런 것들이 아쉬워집니다. 하지만 갑자기 만들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인간은 친밀한 인간관계에서 가장 큰 행복을 느끼도록 진화돼 왔다고 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에게 제일 중요한 건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뤄지는 보상인데, 노년에도 똑같습니다. 다만 우린 그걸 가족에서만 찾는 것 같아요. ‘자식이 찾아오는 게 유일한 행복’인 부모님이라면 아무리 효심 많은 자식이라도 좀 부담스럽죠. 플랜 b c d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친구나 사회관계가 많은 부모님이 본인이나 가족, 자식에게도 좋죠.”
―시니어 콘텐츠 중에는 ‘노년에는 혼자를 즐겨야 한다’거나 ‘웬만한 인간관계는정리해 버리라’는 권유가 많던데요.
“현실에서 사람은 혼자인 시간이 많아요. 타인과 24시간을 함께 지낸다면 상당히 피곤한 일이겠요. 다만 결핍은 아주 안 좋다는 겁니다. 어찌 보면 삶 대부분은 혼자 사는 거예요. 그런 시간에 내가 뭘 할 때 더 재미있고 몰두하게 되는지, 스스로 발견할 필요가 있고요. 이건 중요한 일입니다.”
즐거움을 주는 압정이 많아야
―행복 압정 얘기인가요?
“밟으면 기분이 좋고 즐거운 압정을 많이 가진 자가 행복 게임에서 유리합니다. 인생에 많은 압정을 던져놓고 살면 즐거운 일이 확률적으로 많아지는 겁니다. ‘내 즐거움의 전부는 우리 자식들이랑 밥 먹는 거야’ 같은 한정된 행복압정을 가졌다면 불리하죠. 행복감이 높은 사회에서는 즐거운 압정을 발견하고 개발하는 걸 잘합니다. 그런데 한국인은 자기가 재미있어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눈치를 봅니다. 자기 규제나 검열도 심하죠. 좀 자유로워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떳떳하자?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남들 보기에 시시껍절하더라도 자기 즐거움에 긍지를 가져야죠. 실제로 저희 연구실에서 썼던 논문 주제인데, 한국인은 남들이 칭찬을 안 해주면 자기가 ‘이것 덕에 행복했다’고 얘기했더라도 나중에 생각을 바꿔요. ‘나 혼자 착각하고 있는 건가’라며 흔들리는 거죠. 미국인들은 전혀 그런 경향을 보이지 않아요. 내가 행복하면 그만이지, 친구들이 동의해줘야 할 문제가 아닌 거죠. 우리는 너무 어릴 때부터 사회적 시선과 타인의 평가에 초민감하게 사회화돼 있습니다. 행복을 얻기에 유리한 방향은 아니죠.”
―취미가 다양하다고 들었습니다.
“스포츠도 한두 개가 아니죠. 사람들이 잘 안 보는 아이스하키같은 것도 보고 미식축구, 축구, 야구…. 하루가 굉장히 바쁩니다. 그 경기들 스코어가 어떻게 되는지 다 봐야 되고 음악도 아주 다양한 걸 많이 좋아해요. 친구들과 얘기해 보면 제가 압정이 많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2025년 세계행복보고서 표지. 보고서는 매년 갤럽의 설문조사 데이터를 바탕으로 유엔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와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웰빙 연구센터 등이 협력해 발표한다. 행복심리학은 사회심리학에서 파생된 분야로 집단심리 전공자였던 에드 디너(Ed Diener·1946~2021) 교수가 처음 연구의 필요성을 주창했다.
“제 지도교수님인데, 그 분의 중요한 논문이 1984년도에 나왔습니다. 학부 때 우연히 도서관에서 그 논문을 보게 됐어요. 그는 ‘행복’이 아니라 ‘주관적 안녕감(subjective wellbeing)’이란 표현을 썼는데, 저는 ‘웰빙’보다 ‘주관적’이란 표현이 어린 나이에 인상적이었어요. 디너 교수님이 UN, 갤럽과 교섭해 전세계 행복도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행복은 목표가 아닌 생존의 도구
―행복감이 높은 사회의 특징은.
“최근 연구들을 보면 행복감이 높은 사회는 소수 몇 명에게 에너지를 몰빵하는 사회가 아니에요. 가족은 중요하고 구성원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심리적 타격을 주는 존재지만 새롭지는 않죠. 행복감은 근원적으로 새로움과 연관되거든요. 음식도 똑같은 거 먹으면 질리듯이 인간의 만물에 대한 정서적인 반응 시스템이 그렇게 생겨 먹었어요. 그래서 행복감이 좀 높은 사회의 특성은 테두리 밖에 있는 사람과의 상호작용이 잘 됩니다. 전철에서 마주치는 사람, 단골 식당 주인 아저씨와 농담도 하고 ‘하이, 잘 있었니’같은 작은 대화들을 나누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의 행복감을 예측하는데 중요한 요인인데, 한국이 제일 결핍된 부분입니다.”
―한국사회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요.
“사회적 신뢰가 부족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점을 들 수 있어요. 행복은 복잡한 것 같지만 어떤 보상감을 뇌에서 켜주는 거예요. 호모사피엔스의 뇌가 찾고 있는 건 ‘사람’이라는 자원이죠. 혼자였던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고 이 사람과 뭔가 연결되는 것 같다, 통하는 것 같다고 느낄 때만큼 뇌가 강렬하게 보상을 주는 경우가 없어요. 이 사소한 사회적 경험의 누적이 개인과 그 사회의 행복을 좌우하는데, 우린 그 부분이 취약한 겁니다.
우리는 내 집단(ingroup) 밖에 있는 사람들을 잠재적 경쟁자 아니면 적으로 생각하지요. 이건 장기적으로 가장 행복을 위협하는 요소들입니다. 한국인이 목숨걸고 추구하는 돈이나 지위, 명예보다 가족 친구 동료 간의 연결감과 인정, 소속감이 행복을 유발하는 더 큰 요인입니다.”
최근 젊은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치열한 경쟁문화 탓에 한국생활은 고통스러웠고 지옥 같았다’고 말한 것이 떠올랐다.
천재라는 평가를 받는 임윤찬 피아니스트. 지난 8월 이탈리아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지나친 경쟁문화 탓에 한국에서의 생활이 고통스러웠다”고 토로했다. 동아일보DB
사회적 수준의 행복이 부족한 한국
그는 한국은 사회전체적으로 좀 더 행복해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국 사회가 결핍된 부분 중에 행복 수준과 직결된 것들이 있어요. 첫째가 창의성이에요. 행복하지 않은 조직은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가 없어요. 맨날 야단치고 스트레스를 주면 그냥 본전치기만 하려는 정신상태가 되죠. 지금 한국 사회가 부닥친 한계가 그겁니다.
둘째, 사회적 맥락에서 행복감이 높아야 전반적인 사회의 부패도가 내려가요. 권력을 쥔 자들이 뭔가 ‘해먹고 있다는 느낌’은 사회적 불신을 만들어내고 사회적 관계를 발전시킬 의욕을 저해합니다. 또 한국인의 약점이자 행복감의 발목을 잡는 문화적 사회적 철학으로 과도한 안정 지향성이 있어요. 이런 문화는 행복해지기가 어려워요. 본인뿐 아니라 남들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하거든요.”
2025년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행복하다’는 국민이 가장 많은 국가 1위는 8년 연속 핀란드, 한국은 147개국 중 58위로 지난해보다 여섯계단 떨어졌다.
“행복도가 높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경우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서도 황당할 정도로 개인의 사소한 경험을 존중하고 지켜주려 노력합니다. 많은 이들의 버킷리스트에 들어 있는 노르웨이의 한 절경은 교통이 험난한 곳에 있어요. 사망사고가 빈발하지만 정부당국은 그 길을 폐쇄하지 않아요. 그게 중요한 행복 패키지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가는 기회를 막지는 않되 안전하게 돌아오는 것은 개인 책임인 거죠.
저는 운전할 때 제일 좋아하는 지점이 석양 무렵의 인천대교예요. 그게 좋아서 송도로 이사도 갔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인천대교에 오렌지색 드럼통 1500개를 세워놨더군요. 인천대교에서 자살 시도가 있었다는 거예요. 자살 시도를 근절할 대책이 드럼통? 노르웨이와 대조되는 장면이죠. 다리에서 서해의 석양을 음미하는 수 백 만 명의 경험을 이런 형식적인 조치로 가려도 된다는 의식. 행복한 사회의 방향과는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행복은 좋은 경험과 기억들을 많이 갖는 것이라는 서 교수는 삶의 주변에 밟으면 기분이 좋고 즐거워지는 ‘행복압정’을 많이 뿌려둘 것을 권한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노년에도 제일 중요한 건 사람
“한국 시니어들은 남의 눈치 보느라고 진정한 자기 삶을 못 산 분이 많아요. 인생 첫 챕터를 마무리하고 2막으로 넘어가는 지금부터는 나의 삶을 살아야죠. 그러려면 어딘가 갈 곳이 있고 만날 사람이 있는 삶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뇌는 새로운 변화가 없는 자극에는 점점 무덤덤하게 반응해요.아무리 사랑하는 연인도 수십년 함께 살면 무뎌지는 것과 같은 이치죠. 행복하려면 조금은 새로운 자극을 찾아야죠.”
―교수님 인생2막은 정년퇴직 뒤가 될까요? 아니면 미국에서 귀국한 시점인가요?
“제 장점이자 단점이 미래에 대한 생각을 잘 안 한다는 점이예요. 하하. 종신교수직 받아놓고 한국행을 결정한 이유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인지 스스로 물어보니 대학 시절이었어요. 미국에 계속 있으면 더 많이 논문은 쓸 테지만 너무 똑같은 삶이 이어질 것 같았습니다. 논문을 몇 편 덜 쓰더라도 왜 그런 말 있잖아요. ‘재미있는 지옥’에 가자.”
―‘행복이란 사랑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자주 먹는 것이다’로 결론내도 될까요.
“행복 별 거 아닙니다. 제 행복은 축구보기, 사람들과 탕수육 먹기, 운전하기 등 사소한 것들에서 나옵니다. 행복을 거창한 과업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또 하나, 행복은 즐거움 유무가 중요하지 근심 걱정이 없는 상태는 아닙니다. 걱정거리가 있어도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많은 압정들을 만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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