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가 판치는 ‘슬픈 세상’

안방극장에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풍자가 넘쳐나고 있다. SBS스포츠 ‘EPL프리뷰쇼’는 가상광고를 화면에 띄웠고(왼쪽 위사진), ‘개그콘서트’ ‘무한도전’ ‘슈퍼맨이 돌아왔다’(오른쪽 위부터 시계방향) 등 예능프로그램들은 자막이나 출연자의 분장으로 최순실 사태를 풍자했다. 사진출처｜방송화면 캡처

“내가 이러려고 지구에 왔나”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도와”

■ 너도나도 ‘최순실 사태 패러디’

드라마·코미디·예능 등 무대 다양화
시청자에 통쾌함과 씁쓸한 웃음 전달

“비록 정난정이 그간 국정을 농단해온 죄는 이 나라 만백성이 모두 알만큼 명백하오나 관직에 오르지 않은 여인이고, 증좌(증거)를 상당수 없앤지라 처결에 어려움이 있사옵니다.”

6일 방송된 MBC 주말드라마 ‘옥중화’ 마지막 회에 등장한 대사다. 문정왕후(김미숙)의 권세를 등에 업고 호가호위하던 정경부인 정난정(박주미)을 단죄하기 위한 어전회의 장면에서 등장했다.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어서 시청자의 공감을 샀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대한 풍자가 넘쳐나고 있다. 부조리한 세태를 풍자하는 대중문화 콘텐츠가 주로 코미디프로그램에서 많이 나왔던 과거와 달리 무대도 다양해졌다.

‘국정농단’이란 단어를 대사에 적시한 ‘옥중화’는 이미10월30일 방송에서도 오방낭을 등장시키고, “간절히 바라면 천지의 기운이 마님을 도울 것”이라는 대사가 나오는 등 ‘최순실 사태’를 연상시켰다.

6일 케이블채널 SBS스포츠 ‘EPL 프리뷰쇼’에서는 진행자 정우영 아나운서가 프로그램을 마치며 “원하는 팀을 온 힘 다해서 응원하면 우주가 도와준다. 추운 겨울 따뜻한 곰탕 한 그릇 드시라”고 인사했다. 심지어 ‘숟가락도 남길 수 없는 맛, 순살 곰탕’, ‘최고의 순간을 실감나게, 은하 태블릿’, ‘신데렐라가 포기할 수 없는 구두, 푸라다’ 등을 화면에 띄웠다.

코미디 프로그램은 더 풍자에 적극적이다. KBS 2TV ‘개그콘서트’는 6일 여러 코너를 통해 사태를 비꼬았다. ‘세젤예’ 코너에서 이수지가 최씨를 연상케 하는 분장으로 등장해 ‘태블릿PC’ ‘독일’ ‘실세’ ‘이대’ ‘말’ 등 단어가 나올 때마다 “나 그 사람 아니에요”라고 부인했다. 마지막엔 신발 한 짝을 벗고 퇴장하는 모습까지 연출했다. ‘가족같은’ 코너에서도 박휘순이 “요즘 조사받을 때 곰탕 먹는 게 유행”이라며 최씨가 검찰 조사 첫날 곰탕 한 그릇을 비운 일화를 풍자했다. ‘1대1’ 코너에서도 래퍼 김태원은 유민상에게 “이거, 제가 작성한 가사들인데 좀 봐 달라. 원래 친한 사람들끼리 봐주고 고쳐주고 그러는 거라더라”라며 최씨의 대통령 연설문 수정 의혹을 풍자했다.

앞서 5일 MBC ‘무한도전’은 ‘내가 이러려고 지구에 왔나’라는 자막을 내보내기도 했다. 케이블채널 tvN ‘SNL 코리아’에서는 김민교가 최씨를 떠올리게 하는 분장을 하고, 유세윤은 “‘엄마빽’도 능력인 거 몰라?”라며 최씨의 딸 정유라씨가 SNS에 남겼다는 글을 패러디하기도 했다. SBS ‘런닝맨’, KBS 2TV ‘슈퍼맨이 돌아왔다’ 역시 ‘간절히 바라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는 자막을 띄웠다.

풍자와 패러디는 정치권력이나 기득권층의 오만과 무능 또는 구태와 부조리를 예리하게 비틀고, 대중에게 웃음과 시원한 정서적인 만족감과 함께 씁쓸한 웃음을 통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그동안 정치적인 문제에 거리를 두던 프로그램들도 풍자에 나서면서 이번 사태가 대중문화의 풍자 콘텐츠에 새로운 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원겸 기자 gyumm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