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안현진]삶에는 예고편이 없다 ‘라이프 언익스펙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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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25일 15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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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예고 없이 흘러 간다

\'라이프 언익스펙티드\'의 등장인물들. 왼쪽부터, 매스(베이즈와 케이트의 고교 동창), 베이즈, 럭스, 케이트, 라이언.
\'라이프 언익스펙티드\'의 등장인물들. 왼쪽부터, 매스(베이즈와 케이트의 고교 동창), 베이즈, 럭스, 케이트, 라이언.

오래 산 건 아니지만 30년쯤 살고 보니 좋은 점은 그래도 어릴 때만큼 세상에 치이고 놀랄 일이 적어진다는 거다. 아무래도 이제는 '처음 경험하는 일'들이 줄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되돌아보면 가슴 콩닥이는 연애도 해봤고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아픈 실연에 울어도 봤다. 큰 성공은 아니지만 인생에서 이것저것 성취도 해봤고 밑바닥까지 떨어져 본 건 아니래도 좌절도 있었고, 또 실패와 거절도 경험했다.

이 정도면 프로는 못 돼도 아마추어는 벗어났을 것 같은데 그게 또 아니다. "한치 앞도 모르는 것"이 인생이라는 점에서는 나는 언제나 아마추어다. 나이 들어 공부한다고 고생하려니 뒤늦게 또 한번 철드는 요즘인데, 일을 핑계로 보는 TV에서 '라이프 언익스펙티드(Life Unexpected)'라는 드라마를 만났다.

▶ 30대 미혼녀에게 16살 된 딸이 찾아오다


청춘물이나 로맨스보다는 액션이나 범죄 수사물을 선호하는 내가 이 드라마에 조금이라도 점수를 준 이유가 있다면 30대 미혼 여성에게 일어날 수 있는 나름대로 '예상하기 힘든 일'을 이야기로 풀어냈다는 점이다. 그것도 재미있고 상큼하고 발랄하게.

드라마 속으로 들어가자. 여기 로컬 라디오프로그램의 인기 진행자가 있다. "굿모닝~ 포틀랜드"를 매일 외치며 새벽 5시부터 하루를 시작하는 이 여자의 이름은 케이트 캐시디. 적당히 예쁜 얼굴에 아담한 몸매, 노력해서 그 자리에 오른 만큼 능력 있고 꼭 그 만큼 당당하다. 똑똑한 척 하는 게 좀 얄밉긴 한데 '덤블론드(Dumb Blonde· 머리가 텅 빈 금발 미인을 낮추는 말)'가 아닌 제대로 된 똘똘한 여성 캐릭터다.

케이트가 진행을 맡고 있는 아침 라디오 프로에서 서로를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리는 상대 진행자 라이언과는 사실은 약혼한 사이. 그런데 승승장구 안정된 삶과 결혼을 앞둔 케이트의 앞에 웬 10대 소녀가 나타나서는 "당신이 16년 전에 만들어 낸 게 나에요"라고 말한다.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를 가진 케이트와는 딴판으로 굽슬굽슬한 금발에 파란 눈동자를 가진 소녀의 이름은 럭스. 럭스는 케이트가 고등학교 졸업무도회 날, 당시 학교에서 인기 최고였던 축구팀의 쿼터백 베이즈와 보낸 하룻밤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그것도 사랑의 결과물도 청춘의 그것도 아닌 실수의 결과물.

그 당시 아버지의 눈치만 보던 베이즈가 완전 모른 척 하는 바람에 케이트 혼자 아기를 입양기관에 맡긴 뒤 무작정 앞만 보고 살아왔는데 그런 케이트 앞에 그 아기가 다 큰 소녀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대뜸 부탁하기를, 이제 위탁가정에서 나와 독립해서 살아야겠으니 16년 전 잊어버린 양육포기각서에 서명 좀 해달란다.

그러니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서류작업은 뒤탈 없이(?) 깔끔하게 잘해야 한다. 16년 전에 미처 양육포기각서에 서명하지 못한 케이트는 그렇게 해서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던 베이즈와 다시 만나게 된다. 낳았으되 키워주지 못한 16살짜리 딸을 사이에 두고 말이다. 그리고 책임감이 없었다는 지난날의 죄책감과 럭스를 향한 미안함으로, 둘은 공동양육을 자처한다.

그때부터 케이트, 베이즈, 럭스 세 사람의 삶은 드라마 제목처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굴러간다. 이제 겨우 커리어가 자리를 잡기 시작한 케이트와 '술 마시는 것이 좋아서' 바를 운영하는 베이즈.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갑작스레 시작한 아이 기르기가 순탄할 리 없다. 그들도 겨우 30대 초반에 불과하면서 딸이 벌인 음주가무 파티에는 식겁해서 고함을 지르고 공립학교의 부정적인 교육환경에 대한 TV 뉴스에 불안해져서는 럭스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사립학교로 전학 시켜버린다.
엄마와 딸이라기 보다는 언니와 동생 같은 케이트와 럭스.
엄마와 딸이라기 보다는 언니와 동생 같은 케이트와 럭스.


▶ 철부지 부모, 조숙한 딸

제대로 된 부모 아래서 자라지 못한 케이트와 엄한 부모 아래서 자라 자신감 결여에 철도 없는 베이즈 모두 직접 자식을 길러보기는 처음이라 그렇게 럭스의 일 앞에서는 미숙하다.그리고 예상했겠지만, (TV속에서 묘사되는 미성숙한 부모를 둔 아이들이 늘 그러하듯) 럭스가 오히려 한참 어른스럽다. 그리고 럭스가 아이답지 않은 덕분에 케이트와 베이즈의 부모노릇은 더욱 부족해 보인다.

게다가 16살이라니, 부모입장에서는 아이가 어릴 때보다 여러 가지로 걱정되는 게 더 많을 나이인데 아이 입장에서는 부모의 과잉보호가 답답하게 느껴지는 시기가 아니던가? 게다가 럭스는 이제껏 부모다운 부모를 만나본 적이 없는 터라 갑작스레 보호자를 자처하는 케이트와 베이즈가 고마우면서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기에 한편으로는 못마땅하다.

그런데 그 세 사람이 가족이라는 결코 완벽할 수 없는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그 보다 완전할 수 없는 공동체가 되어가는 과정이 바로 '라이프 언익스펙티드'의 기둥 줄거리다. 청춘물이 가지는 성장담의 낭만적인 성격을 잊지 않으면서도, 그 성장의 범위가 10대인 럭스는 물론 30대인 케이트와 베이즈에게도 해당된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베로니카 마스' '원 트리 힐' '가십 걸' '뱀파이어 다이어리' '베버리힐즈 90211'. 미국 케이블채널 CW의 명성을 높여준 간판 TV 시리즈들이다. 모두 10대를 주인공으로 삼은 청춘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역시 CW에서 방영되는 '라이프 언익스펙티드'는 청춘물인 동시에 가족의 성장담을 그린다는 점에서 위의 드라마와 비슷한 주제를 다룬 영화 '주노', 가족애를 다룬 TV시리즈 '길모어 걸스' '에버우드' 등과 비교된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사건으로 시작은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둥글게 둥글게 이야기를 조립해나가는 '라이프 언익스펙티드'의 온유한 스토리텔링 역시 두루두루 호평을 얻었다. '주노'와 '에버우드'의 산뜻한 조합, 가족 구성원 모두 스스럼없이 즐길 수 있는 드라마라는 평이 대부분. 혹평이라고 해봐야, 제목의 'unexpected(예상할 수 없는)'와는 다르게 예상 가능한 이야기 전개라는 것 정도다.

사실 '라이프 언익스펙티드'는 위에서 설명한 것과는 다르게 럭스의 입장에서 진행된다. 마치 케이트가 주인공이고 어느 날 갑자기 럭스가 찾아오는 것처럼 써놨지만 실은 럭스가 베이즈를 찾아가고 베이즈가 럭스와 함께 케이트를 찾아오는 순서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런데 아무래도 보는 사람(필자)이 30대 미혼 여성이다 보니까, 세 사람 중에서 가장 이입하기 쉬운 캐릭터를 중심으로 두고 드라마를 감상하게 돼 버렸다.
베이즈와 케이트가 처음으로 축하해주는 럭스의 생일.
베이즈와 케이트가 처음으로 축하해주는 럭스의 생일.


▶ 예상치 못한 상황에 무기력한 사람들


럭스가 찾아오면서 케이트의 삶은 무질서에 빠져버린다. 연예인 같은 '공인'은 아니지만 나름 유명인인 덕분에 라이언과의 사이도 공개할 수 없고 더욱이 "사실 내게는 다 자란 딸이 있어요"라고 말할 수도 없는 케이트의 비정상적인 삶이 전적으로 공감 가는 것은 예상치 못한 사건들에 부딪힐 때마다 그가 보여주는 무기력함 때문이다. 그것이 나와 비슷한 상황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실수인 줄 알면서도 베이즈와 술김에 동침하고 약혼자인 라이언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것으로 그 날 일을 감추고 그 얄팍한 위장이 벗겨져 실연으로 이어졌을 때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전진해야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는 등 케이트의 현실대응능력은 TV밖의 나와 그다지 다를 게 없다.

실연 뒤 방안에 어지럽게 놓여진 라이언의 흔적을 상자에 담아 보이지 않은 곳으로 치우고 불도 켜지 않은 채 아이스크림 통을 끌어안고 그 차가운 달콤함으로 배를 채워 구멍 난 마음을 채워보려는 별 소득 없는 시도까지도 특별할 게 없어서 더욱 공감이 갔다.

밑줄 죽죽 긋고 싶은 영화 속 대사 중, 가장 좋아하는 건 '포레스트 검프'에서 나온 인생과 초콜릿 상자와의 비유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 속 초콜릿과 같아서 어떤 맛일지는 포장을 벗겨 입에 넣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는 그 이야기.

아마 이 비유를 좋아하는 이유는 내 인생이 어떻게 굴러갈지에 대한 호기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누군들 안 그렇겠냐마는 꼭 그 호기심만큼의 두려움도 있다. 그러고 보니 '알 수 없어 두렵고 알 수 없어 설레는 게 인생'이라는 대중가요 노랫말도 있었다. 요즘 오래 산 것도 아니면서 재미있는 일도 없고 설레는 일도 없고 열정도 없다고 다 산 사람 같은 말을 어줍지 않게 해왔는데, 당분간 '라이프 언익스펙티드'의 케이트에게 감정이입한 상태로 그녀가 어떻게 삶의 조종간을 붙들고 거친 기류를 헤쳐 나가는지 관찰해봐야겠다.

내 인생에 저런 예상치 못한 일이 닥치지 않음을 조금은 감사하고, 또 한편으론 예상치 못한 일이 찾아와주기를 은근히 기대하면서 말이다.
안현진/ 잡식성 미드 마니아 joey042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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