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정주현] 중간계에 멈춘 피터 잭슨의 상상력, 러블리 본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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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4일 15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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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과 저승을 잇는 세계, 중간계에 대한 묘사와 상상력이 아쉬운 \'러블리본즈\'
이승과 저승을 잇는 세계, 중간계에 대한 묘사와 상상력이 아쉬운 \'러블리본즈\'
많은 영화가 삶과 죽음, 그리고 이와 연관된 가족, 추억, 못 다한 꿈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진지하게 죽은 자의 입장에서 이런 것들을 바라보았을까. 피터 잭슨 감독의 상상력은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영화는 일찌감치 주인공인 수지가 살해당할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려주는 것은 바로 수지 자신의 목소리다. 그는 섬뜩하게도 '나는 열네 살 때 살해당했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수지의 목소리는 영화를 관통하는 화자의 목소리가 된다.

▶ 감독의 과한 욕심이 드러난 중간계의 판타지

갓 열네 살이 된 소녀의 일상이 펼쳐지는 영화의 초반부는 평범하다. 수지에게는 웃음이 끊이지 않는 가족이 있고 가슴을 뛰게 하는 첫사랑도 다가온다. 생일에는 카메라를 선물 받아 기뻐하고 할머니에게는 첫 키스의 느낌을 물어보며 궁금해 한다. 이처럼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소녀의 일상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언젠가는 내일 할 일을 걱정하며 잠들기 보다는 내일 할 일에 가슴이 뛰며 잠든 시절이 있었지' 라는 한탄스러운 푸념까지 나온다.

하지만 이런 아기자기한 일상은 동시에 불편하고 강렬하다. 이는 비극적 사건을 향해 한발자국씩 걸어가고 있는 과정일 뿐임이 영화 시작과 함께 예고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는 그 죽음의 순간을 기준으로 영화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이제 수지는 살아있던 지난 날을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후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직 못 해본 것도 못 가본 곳도 많았던 사춘기 소녀로 인생을 마감한 그는, 살아있는 자들의 세상을 떠나지 못하고 그 주위를 맴돈다. 그리고 이미 죽은 후 일지라도 자신을 죽인 살인자를 마주하는 공포가 어떠한 지, 그리고 그 살인자가 뻔뻔하게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볼 때 느끼는 분노가 어떠한 지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이야기한다. 늘 남겨진 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익숙한 우리에게, 이는 이 영화가 선사하는 색다른 경험이다.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수지는 이승도 천국도 아닌 중간계에서 방황한다. 근접할 수 없이 먼 세계가 아니라 가까운 곳에서 끊임없이 마주치는 바로 그 곳에서, 수지는 가족들과 지속적으로 접촉을 하고 교감을 하려 한다. 그의 영혼은 이미 다른 세계에 속해 있지만 가족들이 '아직 이 곳에 있는' 것 같다고 느끼는 것처럼 동시에 이 세상에도 남아 있다. 그 곳에서 새로 사귄 친구와 함께 이승에서 못했던 것들을 해 보기도 하지만 이미 그 것은 미련과 집착의 표현일 뿐 더 이상의 무엇도 아니다.

안타까우면서도 강렬했던 초반부와는 대조적으로 여기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바로 이 환상의 세계가 위태롭고 산만해 보인다는 것이다. 판타지 장르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피터 잭슨이 창조하는 이 중간계의 세계는 여전히 화려하고 스펙터클 하다. 하지만 동시에 인위적이고 억지스럽다. 상상력이 돋보이는 아이디어와 뛰어난 시각효과로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판타지의 세계가 현실세계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는 현실 세계와 중간계, 이 두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더구나 중간계로 넘어간 수지가 현실 세계와 계속적으로 대화하려 하는 것이 이야기의 중심축인 만큼 이 두 세계의 조화는 영화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이 중간계는 놀이동산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총 천연색의 화려함과 몽환적인 배경으로만 가득하다.

중간 중간 현실세계와의 접점을 힘겹게 찾지만, 긴 이별을 하고 있는 소녀의 아픔이 느껴질 틈은 별로 없다. 그 자체로는 즐거울 수 있지만 현실세계와의 교감은 떨어지는 것이다. 아마도 감독은 자신의 장기인 판타지적 상상력을 여기서도 원 없이 표현해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필요이상의 시간이 할당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가 엄청난 예술적, 상업적 성취를 이루었던 전작 '반지의 제왕'을 떠올려보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우리가 '반지의 제왕'에 그토록 열광할 수 있었던 것은, 각기 다른 환상적 세계가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전체 스토리와 유기적으로 결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마니아적 상상력이 번뜩였던 그의 초기 작품들까지 곱씹어 본다면 아쉬움은 더욱 크다.
살해당한 열네 살 소녀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내러티브적 상상력은 '러블리 본즈'의 백미다. 사진제공 퍼스트룩.
살해당한 열네 살 소녀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내러티브적 상상력은 '러블리 본즈'의 백미다. 사진제공 퍼스트룩.

▶ 내러티브적 상상력, 배우들의 열연 돋보여

이 영화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앨리스 세볼드의 동명소설에서 기본 틀을 가져왔다. 원작이 있다고는 하나 이를 영화화 하는 것은 또 다른 창작력을 필요로 하는 문제로, 이런 점에서 피터 잭슨의 내러티브적 상상력은 과히 존경할 만 하다. 안타까운 죽음과 자신의 죽음으로 고통 받는 가족을 바라보는 아픔,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한 처연한 미련은 그 누구의 목소리도 아닌 바로 자신의 목소리로 절절하게 전달된다.

이야기의 화자를 전환해 열네 살 소녀의 감수성을 제대로 표현해 낸 그의 감성적 상상력이 십분 발휘된 것이다. 만일 피터 잭슨에게 판타지의 재현에 대한 강박관념이 없었다면, 이 상상력은 더욱 빛났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판타지 세계가 주는 괴리감을 그나마 좁혀준 것이 있다면, 바로 배우들의 연기다. 주인공 수지 역을 맡은 시얼샤 로넌이나 아버지 역을 맡은 마크 월버그의 연기는 상당히 훌륭해서 감독의 내러티브적 상상력에 힘을 실어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특히 살인범 하비를 연기한 스탠리 투치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동네엘 가도 꼭 이웃에 한두 명은 살 것 같은 흔한 외모를 가졌지만 그가 뿜어내는 불쾌감은 소름이 끼칠 정도다. 수지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당시의 쾌락에 전율을 느끼는 사이코 패스임에도 그토록 평범한 외모를 가진 이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아무렇게나 빗어 넘긴 머리와 촌스러운 안경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악마적인 시선은 극중 가족들뿐만 아니라 이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뒤통수까지 서늘하게 만든다. 이는 순간순간 늘어지는 극의 흐름에 숨 막히는 긴장감을 불어넣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에서 수다스럽지만 따뜻한 아트 디렉터로서의 모습을 기억하는 관객들이라면 사뭇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영화의 러닝타임은 길고 장르는 복잡하며 상상력은 거대하다. 스릴러를 기대하는 관객이라면 시시하게 느낄 수 있고, 사후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가진 관객이라면 덤덤해질 수 있으며 피터 잭슨의 판타지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산만하다 느낄 수도 있다.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감독의 과욕은, 이런 딜레마를 초래할 수도 있는가 보다.

우스갯소리 하나. 이 영화에는 문학적 장치가 하나 있다. 바로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이다. 수지의 첫사랑은 인도인 가정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자란 아이로 스스로를 무어인, 즉 오셀로에서 이방인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부른다.

과연 이방인답게 이 아이는 까무잡잡한 얼굴색에 곱슬거리는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신세대들은 이 무어인을 어떻게 인식할까.

바로 '구준표 닮은 애'다. (만일 구준표가 누구인지 모르는 어른이 있다면, 오늘 딸과의 교감을 시도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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