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사는 甲, 외주제작사는 乙?… 지상파TV 프로그램 물의

  • 입력 2005년 9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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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SBS 드라마 ‘루루공주’ 등 외주 제작사가 제작한 프로그램이 잇달아 물의를 빚으면서 외주 제작을 둘러싼 온갖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편성권을 무기로 한 방송사의 횡포, 구멍 뚫린 품질 관리 시스템, 프로그램 수주를 둘러싼 비리와 편법…. 방송전문가들은 외주 제작 환경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한 이 같은 고질적 병폐들이 앞으로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제작비, 깎을 수 있는 데까지 깎아라=KBS, MBC, SBS는 2003년 외주 제작비를 매년 물가 인상률만큼 올려 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지난해 지상파 광고 경기가 나빠지자 KBS는 10∼40%씩 외주 제작비를 삭감했다. 외주 제작사의 항의가 빗발치자 KBS는 지난해 “제작비 대신 제작비율을 6% 올려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올해 KBS는 모든 제작비의 삭감 방침에 따라 외주 제작비를 다시 삭감했다.

외주 제작사의 모임인 독립제작사협회의 한 관계자는 “방송사가 제작비를 자꾸 삭감하니까 프로그램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대기업이 노조 파업으로 임금을 올리면 하청업체의 부품 단가를 낮춰 이를 상쇄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허술한 품질 관리=SBS ‘루루공주’에 출연 중인 김정은은 10일 과도한 간접광고와 무리한 촬영 일정을 문제 삼아 출연 포기 의사를 내비쳤다.

‘루루공주’는 ‘비데공주’로 불릴 만큼 간접광고가 드라마의 흐름까지 바꿀 정도였고 김정은이 늘 옆에 끼고 사는 강아지 인형이 20년 전 회상 장면에도 나오는 등 말이 안 되는 내용이 방영됐다.

이에 대해 외주 제작사들은 “방송사가 주는 회당 평균 7000만 원의 제작비로는 연기자 출연료도 감당하기 힘들어 간접광고비로 제작비를 충당할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한다.

▽‘아이디어도 마음대로 갖다 쓴다’=KBS가 지난해 9월 초 외주 제작사를 상대로 프로그램 기획안을 공모하자 A사는 ‘○○○의 행복한 밥상’이라는 참살이(웰빙) 위주의 식단을 소개하는 기획안을 냈다.

그로부터 2개월여 후인 11월부터 KBS에선 ‘행복한 밥상’이란 프로그램이 방영되기 시작했다. 정작 이 프로그램 제작을 맡은 곳은 A사가 아닌 다른 외주 제작사. 이 회사는 당초 기획안을 낸 적이 없는데도 제작사로 선정된 것이다.

A사 관계자는 “프로그램 이름만 ‘행복한 밥상’으로 줄어들었을 뿐 참살이 식단이라는 개념이나 진행 방식은 우리 기획안과 비슷하다”며 “아이디어가 도용됐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KBS를 상대로 항의했다간 앞으로 프로그램을 못 딸 것 같아 참았다”고 말했다.


KBS의 한 PD는 “위에서 봐주지 않는 한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며 “다른 회사의 좋은 기획안을 자신과 관련 있는 기획사에 넘겨 주는 일이 종종 있다”고 털어놓았다.

또 SBS는 7월 외주 제작사가 만든 다큐멘터리 ‘다시 보는 DMZ’를 방영하면서 제작사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다른 회사가 제작한 것처럼 자막을 내보냈다가 제작사로부터 1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끊이지 않는 비리 사슬 의혹=외주 제작사 S프로덕션이 2003년 KBS 드라마 제작 당시 설 선물 명목으로 일부 간부에게 수백만 원 상당의 상품권을 돌리고 담당 PD들에겐 ‘야외비’ 명목으로 100만∼200만 원을 매달 지급했다는 의혹이 최근 제기됐다. 이에 대해 KBS 측은 “‘야외비’는 정상적인 제작비 집행의 일부”라고 설명하고 있다.

▽대안은=방송학자들은 갑의 위치에 있는 지상파 TV는 소규모 업체인 외주 제작사를 동반자적 관계로 인식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제작비 증가와 광고 감소를 외주 제작사에 전가하지 말고 자체 구조조정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35%로 정해진 외주제작 의무 비율을 점차 늘리면서 제작비 쿼터제를 도입하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하다. 방송사 전체 제작비 중 일정액을 외주 제작사에 할당하면 헐값 제작 풍토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론 공정거래위원회나 방송위원회 산하에 방송사의 불공정거래 행위를 체계적으로 감독하는 기구도 도입할 수 있다.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연구센터 이만제 수석팀장은 “근본적으론 현재 방송사가 갖는 프로그램 저작권을 원제작자인 외주사가 갖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제작사가 저작권을 이용해 방송 외에 다양한 경로를 통해 수익을 올릴 수 있어야 좋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힘을 쏟을 수 있다”고 말했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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