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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7월 8일 18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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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그는 SBS ‘한밤의 TV연예’에서 연예계 소식을 또박또박 전하고 ‘두 남자쇼’에서는 신동엽의 따발총 말발에 약간 어눌한 말투로 대응한다.
또 지난해 11월부터 SBS FM ‘2시 탈출’의 DJ로 ‘은은한’ 진행 솜씨를 선보이고 있다. 자신이 출연하는 프로그램들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 중이라며 ‘자화자찬’하는 유정현을 서울 여의도의 한 방송국에서 만났다.>
▽‘엉뚱한’ 발상이 내 특기〓아나운서 출신이면서도 각종 오락 프로그램에 불려 다니는 것은 유정현의 ‘엉뚱함’이 시청자에게 어필하기 때문이다. ‘한밤의…’에서의 일이다. 한 여성 로커가 “무대에서 끝까지 살아있을 것”이라고 말하자 유정현은 리포터들에게 귓속말로 이렇게 말했다. “그럼 언제는 죽었었냐?”고.
한번은 공동진행자였던 슈퍼모델 이소라와 동시에 웃음보가 터져 몇 초 동안이긴 하지만 진행에 차질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유정현은 언제 실수를 했었냐는 듯 태연하게 방송을 마무리했다. “다음 코너를 소개 못할 정도로 많이 웃어서 프로그램을 끝낸 뒤 ‘연출자에게 죽었구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이충용 PD가 다가오더니 ‘자연스러워서 좋았다’고 말해주시더군요.”
▽홀로 책임지는 라디오가 좋다〓유정현이 최근 각별한 즐거움을 느끼는 분야는 ‘라디오’다. TV가 꽉 짜여진 대본으로 이뤄진다면 라디오는 혼자서 북 치고 장구치는 재미가 있다는 것. 그래도 전임 진행자였던 박철의 자유분방함을 넘어서야 한다는 부담감도 만만치 않다는 게 그의 얘기다.
“라디오에서 1분은 긴 시간으로 느껴집니다. 게스트 코너가 끝나고 마지막 멘트를 마쳤는데도 시간이 남았을 때의 심경이란…. 진땀이 흐르더군요. 가끔 실수도 하는데요. 며칠 전 ‘투야’라는 그룹을 ‘토야’라고 소개했다가 인터넷에서 항의가 쏟아져 바로 정정하기도 했어요.”
▽성악학도, 아나운서되다〓라디오에 대한 그의 애착은 유정현이 학창시절에 가졌던 꿈과 연관이 있다. 연세대 성악과에 재학 중이던 그는 ‘클래식 음악 프로듀서’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의견은 좀 달랐다.
“언젠가 동문 선배인 중견 아나운서 차인태씨가 ‘넌 발음이 정확하고 얼굴도 괜찮으니 아나운서가 어울린다’는 조언이 미래를 바꾼 계기가 됐어요. 합창단 멤버로 관객 앞에 많이 섰으니 카메라 앞에서도 떨지 않겠다 싶었죠.”
유정현은 1993년 11월, 2번의 낙방 끝에 수 백대 1의 경쟁률을 뚫고 SBS 아나운서가 됐다. 초년병 시절 교통정보센터에서 아침교통 상황을 전하다 성수대교가 붕괴된 현장을 발빠르게 전했는가 하면, 맡겨진 일을 날 밤을 새가며 깔끔하게 처리하는 책임감과 업무 능력을 보여줘 제작진에게 신뢰를 얻었다.
▽프리랜서 그리고 마흔 다섯 뒤?〓유정현은 1999년 10월 ‘편안한’ 직장 생활을 포기하고 ‘불안정한’ 프리랜서를 선택했다. 자신의 나이에 어울리고 개성 있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좋은 진행자로 남기 위해서란다.
“앞으로 3∼4년 동안은 지금처럼 젊게 가고 싶어요. 그 다음은 주부 대상 아침 프로그램 진행자가 돼 있겠죠. 누구나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으니까 새로운 무엇을 할지를 고민 중입니다.”
그러면서 뜻밖에도 유정현은 마흔 다섯 살까지 열심히 방송한 뒤 ‘놀겠다’고 했다. 사랑하는 가족과 여행을 다니며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라나.
항상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자 노력한다는 그는 항간에 떠도는 ‘느끼한 진행자’라는 평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저요? 지식이 많진 않아도 지혜롭게 살고 싶어요. 행동이 느리고 목소리가 나지막해서 그렇지, 저 ‘담백한’ 사람입니다.”
<황태훈기자>beetlez@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