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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7월 29일 18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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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사정…’의 갈등구조는 단순하다. 신출귀몰한 살인범(안성기 분)을 쫓는 형사(박중훈)의 집요한 추적이 에피소드 위주로 편집돼 있다.
그러나 도입부의 흑백 화면부터 이 영화에는 고속 촬영, 컴퓨터그래픽, 유화 애니메이션, 액션의 속도감을 증폭시키는 ‘모션 블러 기법’ 등 온갖 현란한 기교를 동원한 볼거리가 가득하다.
박중훈과 권용운의 달리기, 박중훈과 박상면의 싸움 장면 등 새로울 것이 없는 설정도 기발한 카메라 각도와 그림자 등으로 재치있게 표현, 폭소가 터져나오게 만든다.
이 영화에 쓰인 영상 기교의 정점은 초반부 가파른 계단에서의 살인장면과 탄광촌을 무대로 한 마지막 결투장면.
쫓고 쫓기는 현실의 잔혹함을 뛰어넘어 삶의 비의를 담은 듯, 아름답고 비장한 이들 장면은 망막에 그 잔상이 오래도록 머무는 진귀한 시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영화속 장기 미제사건이 지루한 소강상태에 빠져드는 후반부에 접어들면 이야기의 전개 속도 역시 느슨해진다. 이감독은 추격자의 집념에 대한 묘사보다 현란한 기교에 너무 치우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인정사정…’이 기교의 실험장, 전형적인 형사물에 그치지 않는 이유는 쫓는 자의 감성에 대한 감독의 성찰 덕택이다.
박중훈이 도중에 찾아가는 여동생의 집은 ‘나의 사랑 나의 신부’를 연상시킬 만큼 아기자기하고 밝은 조명으로 비춰 그늘없이 따뜻하다.
박중훈은 이곳에서 동생의 배웅을 받으며 어둠속으로 뛰어간다. 소박하고 따뜻한 곳을 떠나 정글같은 세상으로 달려가는 자의 뒷모습. 이 장면에는 감독이 “따뜻한 곳에서 등돌리기”라고 설명한 영화의 주제가 농축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 형사물의 남성적인 분위기와 극도의 사실성, 만화적인 상상력, 재치있는 유머가 절묘하게 어우러진데는 감독의 연출솜씨뿐 아니라 배우들의 연기의 힘도 크다.
허허실실하면서도 무섭게 돌진하는 우형사의 양면을 잘 그려낸 박중훈의 연기가 단연 빛난다. 11년전 탈주범 지강헌 사건으로 더 유명해진 비지스의 ‘홀리데이’, 록으로 편곡한 ‘해뜰 날’ 등 음악의 절묘한 사용도 두드러진다. 31일 개봉.
▨ 이명세 감독 인터뷰 ▨
‘첫사랑’‘나의 사랑 나의 신부’등 몽환적이고 예쁜 영화들을 주로 만들어온 이명세 감독(42). 그가 10여년전부터 “동적인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된 계기는 엉뚱하게도 TV의 ‘동물의 왕국’을 보면서였다.
“고속촬영과 망원촬영, 레게 음악으로 표현된 생존게임이 고통스럽지만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또한 살아가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는 “동적인 리듬, 몰두하는 모습, 너와 나의 경계가 없어지는 상태를 액션에 담기 위해” 월드컵 축구경기를 수없이 되풀이해 보기도 했다.
상상력과 기교, 유머가 넘치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밑바탕에 깔린 사실적인 묘사는 이감독이 96년말 석달동안 인천서부경찰서에 매일 출근하며 강력반 형사들과 동고동락한 취재의 결과다.
범인의 애인 역 최지우의 집도 이감독이 형사들과 함께 3일간 잠복근무를 했던 실제 공간의 모양새를 거의 그대로 옮겨온 것.
“TV의 ‘경찰청 사람들’처럼 형사 한두명이 범인을 쉽게 잡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도 검거현장에 따라갔다가 얼떨결에 쇠파이프를 들고 범인 한 명과 맞선 적이 있는데 눈을 보는 순간 겁이 덜컥 났다.”
할리우드나 홍콩 영화의 코트 자락을 펄럭이는 멋진 형사가 아니라, 껄렁한 깡패처럼 운동화를 신고 쇠파이프를 들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형사들의 리얼한 모습은 그렇게 탄생했다.
집요하기로 소문난 이감독은 박중훈에게 모델 형사의 출신고교인 ‘여주농고’가 쓰인 운동복을 만들어 입혔을 정도.
이감독은 “실제 현실은 더 드라마틱하다. 아마 박중훈에게 모델이 됐던 형사의 말과 행동을 그대로 연기하도록 했다면 지나친 과장처럼 보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희경기자〉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