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100일 동안 전 세계 금융시장이 요동치면서 국내 기업의 외화 조달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예측 불가능한 ‘갈지자’ 관세 행보에 미 국채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고, 이로 인해 아시아 채권시장까지 급속히 냉각됐기 때문이다. 중요 자금 조달 통로 중 하나인 외화채 발행이 잇달아 꼬이면서 기업들의 고심도 깊어지고 있다.
27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이달 들어 국내 기업들은 약 13억6600만 달러 규모의 외화채권을 발행하는데 그쳤다. 작년 4월(49억 달러)과 2023년 4월(50억 달러) 대비 27%에 불과한 수준이다. 이달 중 외화채권 발행 계획을 세워 놨음에도 투자자 모집에 나서지 못한 기업만 신한은행, 포스코홀딩스, 한국토지주택공사 등 10곳이나 된다. 이달 중 만기가 돌아오는 외화채가 44억 달러(약 6조3300억 원)어치나 되지만 외화 조달 시장이 얼어붙은 것이다. 특히 외화채의 약 80%를 차지하는 미국 달러채 발행은 상호관세 폭풍이 몰아친 4월 들어 자취를 감췄었다. 한미 통상 협의가 시작되고 관세 전쟁이 다소 누그러진 24일에서야 KT&G와 하나증권이 달러채를 발행했다. 이는 3월 27일 LG에너지솔루션의 조달 이후 처음이었다. 한 달 가까이 달러채 발행이 ‘0건’인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국내 대기업 자금 담당 임원은 “싱가포르, 홍콩 소재 기관투자가들을 연이어 만났지만 투자 수요가 너무 저조해 결국 외화 자금 조달 시기를 미루기로 했다”며 “시장 분위기가 이렇게 나쁜 것은 코로나19 이후 처음”이라고 했다. 한 금융지주 자금 담당자는 “특히 상호관세 발효일(9일) 이후 많은 기업들이 ‘도무지 발행 못 하겠다’며 의욕을 잃은 상태”라며 “(관세 전쟁이) 완화 기조라는 전망도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언제든 말을 바꿀 수 있는 거 아니냐”고 토로했다.
기업들의 외화채 발행이 잇달아 좌초된 것은 미국 관세전쟁으로 채권 시장 변동성이 커진 탓이다. 특히 이달 2일(현지 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해방의 날’이라며 상호관세를 발표한 직후 미 경제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면서, 미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9일 장중 한때 4.5%까지 상승(채권 가격 하락)했다.
세계 금융 자산의 기초인 미 국채 금리가 오르자 국책은행들의 외화채 유통금리도 최대 0.10% 포인트 오르기도 했다. 연쇄적으로 글로벌 채권 시장이 출렁거려 기관투자가는 채권 가치 하락을, 기업은 이자 비용을 부담스럽게 느끼면서 채권 시장이 얼어붙은 것이다. 게다가 관세전쟁이 격화되며 글로벌 무역 규모가 위축될 것이란 점도 외화채 시장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간 국내 기업이나 금융기관들은 미국·호주 달러, 유로화, 스위스프랑 등 외화표시 채권을 꾸준히 발행해 왔다. △만기 채권 상환 △해외법인 설비 투자 △수입 물품 대금 지급 △외화 유동성 확보 등 다양한 목적으로 외화 조달이 필요해서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기업들이 발행한 외화채는 521억 달러(약 75조 원)에 달했다.
하지만 시장 냉각으로 이달 중 만기가 돌아오는 채권을 갚기 위해 신규 외화채 발행을 추진해 온 기업들은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이들은 보유 중인 원화를 해당 통화로 바꾼 다음(스와프), 채권 투자자들에게 상환해 주고 있다. 시장을 통한 외화 조달이 어려워지자 추가적인 스와프 비용을 부담하며 빌린 돈을 갚고 있는 것이다.
계획을 늦춰 이달 말∼다음 달 초순 중 발행을 검토하는 기업도 일부 있다. 하지만 주요 기업들이 줄지어 대기 중인 데다 시장 불확실성도 여전한 점이 문제다. 투자은행(IB) 업계 관계자는 “외화채 발행 계획을 짜는 기업들은 재무 상태가 비교적 탄탄해 디폴트에 놓일 가능성은 낮다”면서도 “아시아 채권 시장이 사실상 ‘셧다운’되면서 기업들의 자금 운영 전략에 어려움이 생긴 것은 틀림없다”고 말했다.
미 국채 시장을 둘러싼 시장의 우려도 지속되는 분위기다. 25일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공개한 금융안정보고서에서 연준은 “유동성이 미국 국채 시장과 주식 시장 양쪽에서 악화되고 있다”면서 “시장 유동성이 역사적으로 최저 수준을 유지하는 상황에서 4월에 더 악화됐다”고 진단했다. 또 연준의 시장 참여자 설문조사에 따르면 12∼18개월 동안 금융 안정에 잠재적인 충격이 될 수 있는 요인으로 응답자의 27%가 ‘국채 시장 기능’을 선택했다. 이는 작년 가을(17%) 같은 조사 대비 10%포인트 높아진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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