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대기업간 기술탈취 논란
부처별 산재된 법제… 신속대응 불가
“기밀유지협약 체결 관행 확립 등
양측 모두 기술인식 높여야” 지적
최근 국내 헬스케어 스타트업인 알고케어가 자사의 기술을 대기업 계열인 롯데헬스케어가 도용했다고 주장해 중소벤처기업부가 실태 조사에 나서면서 스타트업의 기술보호가 산업계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두 회사의 주장이 엇갈리는 가운데 스타트업 업계에선 이 같은 기술침해 주장이 나왔을 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신속한 구제 지원이 이뤄질 수 있도록 관련 법 제도가 정비돼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 관련 법률 산재… “기술보호 관문 찾기 어려워”
업계에선 스타트업이 기술보호를 받을 수 있는 법제가 여러 부처에 흩어져 각기 운용되기 때문에 피해 기업이 기술보호 ‘관문’을 찾기 어렵다는 점을 호소하고 있다.
국내 기술보호 관련 법률은 산업기술보호법(산업통상자원부), 영업비밀보호법(특허청), 중소기업기술보호법(중소벤처기업부), 방위산업기술보호법(국방부), 하도급법(공정거래위원회), 형법(법무부) 등 여러 부처에 적용돼 있다. 법률적 역량이 낮은 스타트업으로서는 자신이 겪은 기술침해 피해를 어느 부처, 어느 법에 호소해야 할지 모른다는 게 문제다. 더구나 하나의 쟁점이 된 서비스가 여러 법률에 걸쳐 있는 경우도 많아 결국 모든 부처의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오히려 ‘풍요 속 빈곤’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손승우 한국지식재산연구원장은 “스타트업의 참신한 기술과 아이디어 보호에 대해 별도의 보호정책이 마련돼야 한다”며 “특허, 영업비밀, 산업기술 등 관련 기술침해, 사후 대응 등을 한 번에 조회하고 지원받을 수 있는 ‘기술보호 원스톱 플랫폼’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스타트업의 기술보호 역량도 낮은 게 현실이다. 중소벤처기업부와 대·중소기업·농어업협력재단의 ‘2022년 중소기업 기술보호 수준 실태조사’(전국 3400개 기업 조사)에 따르면 스타트업을 비롯한 중소기업의 기술보호 역량 점수는 49.3점으로 대기업(87점) 대비 56.7%에 그쳤다. 일례로 국내 핀테크 스타트업 ‘팍스모네’의 경우 신한카드와 4년째 법정공방을 해오고 있다. 이 회사는 국내 최초로 신용카드 회원 간 결제 서비스 관련 핀테크 기술을 개발해 국내외에서 특허를 등록했다. 하지만 업무 협력을 제안하며 관련 기술에 대한 설명을 들었던 신한카드가 유사한 서비스를 내놓으면서 영업활동이 막혔다. 홍성남 팍스모네 대표는 “직원들은 뿔뿔이 떠나고 장기간 소송을 거치며 법률비용이 계속 발생해 이중고를 겪고 있다”고 토로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중소기업 기술 탈취 근절을 국정과제 중 하나로 내세웠는데도 여전히 대기업은 중소기업, 스타트업에 대한 거래상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사업 제안을 모방하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 “대기업과 스타트업 기술보호 인식 높아져야”
대기업과 스타트업 양측 모두 기술보호 인식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기술보호 전문가인 손보인 법무법인 연두 변호사는 “해외에서는 스타트업과 협력할 때 NDA(기밀유지협약)부터 체결하는 게 관행”이라며 “스타트업은 사업 협력을 제안하는 ‘을’의 입장이라도 NDA 체결을 해야만 상대 측이 기술을 함부로 이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현재 기술 도용 논란을 빚고 있는 알고케어와 롯데헬스케어도 NDA를 체결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법무법인 김앤장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 창업한 알고케어의 정지원 대표는 “롯데헬스케어에 NDA를 요구하자 ‘롯데지주가 세운 회사라 그룹 회장이 계약해야 하기 때문에 곤란하다. 절대 따라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거부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롯데헬스케어 측은 “알고케어로부터 NDA 체결 요청을 받은 적이 없다”는 입장이다.
대기업들은 스타트업에 투자하려면 해당 회사의 속사정과 기술을 충분히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그 노력을 기술 탈취로 싸잡아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호소한다. 하지만 이번 논란을 계기로 자성(自省)의 목소리도 나온다. 한 대기업 임원은 “기술보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우리가 ‘갑질’을 하는 건 아닌지 먼저 조심해야 한다”며 “투자 담당자 한둘의 문제가 아니라 회사 전체적으로 스타트업과 상생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인구당 스타트업 수(1400명당 1개)가 세계 1위인 이스라엘의 경우 특정 기업이 기술을 탈취하면 평판이 추락해 업계에서 매장당하는 스타트업 에코 시스템이 조성돼 있다. 한 이스라엘 투자업계 관계자는 “한국에서는 기술을 탈취한 기업이 크게 처벌받지 않기 때문에 스타트업의 참신한 기술과 아이디어가 보호받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 국내 기술침해 관련 손해배상은 3배 이내 배상이다. 기본 손해배상액의 3배 이내를 배상한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이 배상액을 ‘3배 이내’에서 ‘5배 이내’로 상향할 것을 제안한다. 손 변호사는 “법원에서 입증해 산정되는 기본 손해배상액이 평균 5000만 원 수준”이라며 “대기업 입장에서는 스타트업의 기술을 베껴 별문제 없이 잘되면 좋고 아니면 물어 주면 끝이라는 생각을 갖게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송창석 숭실대 경영학부 교수(중소벤처기업정책학회 회장)는 “기업윤리 교육을 강화하는 한편 창의적인 기술을 개발하는 기업을 밀어 주고 보호하는 정부의 확고한 의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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