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억 원대의 자금을 굴리는 A자산운용사는 지난달 부동산 자산을 인수하는 사모펀드를 결성하기 위해 투자자 모집에 나섰다. 펀드 규모가 50억 원 정도로 크지 않았고 투자를 약속한 투자자의 대부분이 캐피털사 등 기관이어서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이 펀드는 만들어지지 못했다. 펀드자산을 맡을 수탁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투자자들도 떨어져 나가면서 없던 일이 됐다.
수조 원대의 피해를 연달아 일으킨 라임·옵티머스 사태 이후 사모펀드 업계가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다. 투자자들이 외면하는 데다 은행권마저 신규 사모펀드에 대한 수탁을 거부하면서 사모펀드 시장이 고사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8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올해 들어 11월까지 사모펀드 신규 설정액은 총 56조7345억 원(월평균 5조1577억 원)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같은 기간 신규 설정액이 100조 원(월평균 9조2191억 원)이 넘었던 것에 비하면 규모가 절반 가까이로 줄어든 것이다. 사모펀드 성장세를 따라오지 못했던 공모펀드의 신규 설정액이 지난해 1∼11월 9조 원대에서 올해 같은 기간 13조 원대로 늘어난 점을 고려하면 사모펀드 시장의 위축은 심각한 수준이라는 평가다.
사모펀드 시장의 추락은 투자자는 물론이고 금융권에서조차 불신이 커졌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모펀드 수탁을 담당하던 주요 시중은행들부터 몸을 사리고 있다. 이영 국민의힘 의원이 금융감독원에서 받은 ‘은행권 펀드 수탁계약 현황’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9월 4603건이었던 국내 시중은행 사모펀드 수탁계약은 올 들어 9월까지 1881건으로 59.1% 줄어들었다. 지난해 월평균 77건의 수탁계약을 체결한 KB국민은행의 올 들어 9월까지 평균 계약건수는 18건으로 76.6% 줄었다. 각각 126건, 123건의 월평균 계약을 체결했던 하나은행과 신한은행의 계약건수도 57건, 70건으로 반 토막 났다.
은행들이 사모펀드에 등을 돌리는 건 수탁 수수료에 비해 위험 부담과 책임이 크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모펀드 수탁 보수는 평균 0.01∼0.03%로, 1000억 원 규모의 사모펀드 수탁을 맡으면 1000만∼3000만 원 수준이다. 반면 감시와 책임은 더 강해지고 있다. 금융당국은 라임·옵티머스 사태를 겪으며 느슨했던 사모펀드 관련 수탁 은행에 대한 관리·감시 기능을 강화하고 있다. 금융투자협회 관계자는 “법적으로 수탁을 강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보니 운용사들은 발만 동동 구르며 시장의 위축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라임·옵티머스 사태 이후 투자자들의 불신과 외면도 사모펀드 시장을 위축시킨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올 10월 말 기준 개인투자자 대상 사모펀드 판매 잔액은 18조3041억 원으로 지난해 6월 말(27조258억 원) 이후 16개월째 감소세를 이어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사모펀드 시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 보완은 필요하지만 모험 자본을 키우고 혁신기업의 성장을 지원하는 순기능의 싹마저 없애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사모펀드는 여전히 코스닥 벤처시장의 자금줄 역할을 하고 있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저금리 상황에서 다양한 투자처를 가진 사모펀드 시장 활성화는 피할 수 없는 세계적 흐름”이라며 “운용사의 부실을 막고, 개인투자자들의 투자 적격성 등을 꼼꼼하게 따지기 위한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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